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 - 영화가 묻고 심리학이 답하다,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김혜남 지음 / 포르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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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삶에 대해 알고 싶기 때문이다. 유머와 즐거움으로 가득 찬 영화에도 슬픔이 있고 고단함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인간의 심연에 닿는 것처럼.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 박사가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에서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인간의 마음이다. 쉽게 들여다볼 수 없어서 잘 모르고 어려운 그것. 영화라는 질료를 토대로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고 그에 따른 분석을 이끌어내며 성장할 수 있도록 알려준다.


모두 34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는데 최근 개봉된 작품보다는 그 이전의 작품이 대다수다. 저자의 10~20년 전 원고를 뒤늦게 책으로 출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작품이 아니라도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그에 맞게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본질적인 고민과 삶에 대한 의문은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끌리는 영화, 좋았던 영화, 궁금한 영화를 먼저 읽어도 큰 무리는 없다.


살면서 사랑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때가 있다. 모든 게 사랑으로 응집되는 순간들, 기쁨으로 채워지기만 바라는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 이별의 수순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고통스럽다. 사랑했던 기억만을 안고 아름답게 이별하면 좋겠지만 머리의 생각은 가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영애와 유지태 주연의 <봄날은 간다>에서 쪼잔하고 유치한 행동을 일삼는 유지태처럼 말이다.


실연은 일상을 빛이 사라진 어둠의 세계로 전락시킨다. 그 과정에 개인차가 있겠지만 단 번에 벗어나기는 어렵다. 아마도 지금 이별 중이거나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라면 저자의 이런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사랑에 국한된 건 아니다. 어쩌면 모든 관계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친구와 다투고, 오래된 이들과 관계를 단절할 때 상처를 받는 이유도 비슷하니까.


우리가 사랑할 때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릴 때 자아가 수축하고 감소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할 때 느낀 충만함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허탈하고 공허해지는 것이다. 사랑 중에 느꼈던 합치의 희열은 반대로 실연후의 외로운 자아를 더욱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만든다. 연인이 함께 만든 우리라는 세계는 이제 나라는 원소로 환원된다. 자신만이 상대의 유일한 사랑이라 여겼던 행복감이 사라지고, 고갈되고 무가치하며 무의미한 자신만이 홀로 남는다. 실연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자아 중심부를 강타하여 그것을 흩트리고 부수어버리기도 한다. (「사랑의 종말이 마치 죽음처럼 느껴질 때」30쪽, <봄날은 간다> 중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들의 사랑에 스스로를 대입시킨다. 타자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좋은 인생 교과서가 된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경험하지 못한 부분,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과 노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이런 영화를 보면 좋을 것 같다. 노년의 부부에게 찾아온 돌봐야 할 아이와의 시간. 영화에서 불화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주변에서 흔한 모습이다. 딸이 남자친구의 아들을 부모에게 맡긴다. 내가 부모의 입장이라고 맘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돌봄의 시간에서 부모는 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게 분명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모르고 온전히 저자의 소개에 따라 짐작하고 상상한다.


우리가 삶을 지루해하거나 따분해하지 않는다면, 주변에 돌봐야 할 사람이나 일이 있다면, 또 피할 수 없는 상실을 감수할 만큼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으며 성숙하다면 늙는다는 것은 그리 어렵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다. 노년을 향한 행진은 유아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동안 겪어온 수많은 상실과 이별은 인생 최후의 상실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를 충분히 준비시켜주었다. (「시간이 모여 황금빛 호수를 이룬 곳에서」141~142쪽, <황금 연못> 중에서)


무기력하게만 여기는 노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스스로 포기한다면 삶은 앙상한 가지처럼 쉽게 부러지고 말 것이다. 뭔가 생산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관계를 돌아보며 할 수 있는 일에 참여한다면 노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사와 즐거움이 충분하지 않을까.


영화를 말하는 책이 주는 즐거움은 영화제 수상작은 물론이고 좋은 영화를 다시 만나는데 그치지 않고 한 번 더 감동하고 치유받는 일이다. <가위손>, <굿 윌 헌팅> , <러브레터> , <흐르는 강물처럼>, <왕의 남자>, <박하사탕>, <기생충> 같은 영화를 다시 찾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제목만으로 익숙한 영화도 많이 글로 영화를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기회가 닿으면 보고 싶은 영화는 <더 도어>였다. 과거의 한순간으로 돌아가 지난 삶을 수정하고 싶은 모두의 욕망을 잘 보여준 영화라고 여겨진다. 소재나 구성도 독특하고 그 안에 담긴 사유도 훌륭한다. 물론 이 모든 건 저자의 소개 덕분이다.


세상에는 완전히 악한 사람도, 완전히 선한 사람도 없으며,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흘러가며 윤회한다. 우리는 종종 시간을 되돌린다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의 선택들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다.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언제나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 잘못된 선택을 통해 배워나가면서 그만큼 성장하고 오늘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일 테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을까」155쪽, <더 도어> 중에서)


정신분석 전문의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도 훌륭하다. 균형 잡힌 해설이라고 할까. 영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는 느낌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어 이제껏 만나지 못한 영화에 대한 갈증도 해소시킨다.


영화 속 인물은 현실 속 우리와 닮았기에 쉽게 빠져들어 공감할 수 있다. 현실에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영화를 통해 만났을 때 어쩌면 그랬을 수 있겠다 하는 유연한 생각을 안겨준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그런 건 아닐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인간의 내면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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