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인가 싶을 정도로 포근한 오후다. 미세먼지가 걱정이지만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도 좋을 것 같다. 이대로 겨울 추위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겨울 속 봄 같아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친구와의 통화는 언제나 반갑고 고맙다. 나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울컥한다. 잡다하고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하면 웃으면서 그 안에 숨겨진 걱정과 속상함을 알아차리는 친구다.


떨어져 있지만 항상 그립고 그리운 친구다. 우리는 어쩌다 친구가 되었을까. 긴 시간 친구로 지내지만 자주 통화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힘겨운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 그저 목소리만 들어도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런 친구이고 싶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따져보면 어떤 공통점도 없다. 친구라는 끈이 우리를 지탱할 뿐이다. 그래서 친구가 좋다. 가족과는 무언가가 서로를 끌어당긴다. 우리의 통화는 한동안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거기 네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친구처럼 좋은 시집을 곁에 두었다. 한 권은 이혜미의 『빛의 자격을 얻어』이고 다른 한 권은 윤희상 시인의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다. 모두 나를 위한 선물이다. 한 권은 내가 나에게 선물한 시집, 다른 한 권은 감사한 선물이다. 시집은 내게 좋은 친구다. 거기 시집이 있어 좋다. 거기 시집이 있어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 거기 시집이 있어 마음의 한자리를 부드럽게 안아준다.


불을 켜두고 집을 나선다


들어서면 표정을 감추는

오래된 친구들을 위해


어제는 옛날에 대한 이야기했어

우유 투입구로 불쑥 들어오던 손

싸구려 장난감이 든 캡슐

손끝을 떠나지 않던 새

두꺼운 만화 잡지와

알코올램프, 비커, 샬레

과학실의 아름다운 이름들


꺼지지 않는 벽난로와 단단한 비눗방울

불붙은 들판과 끝없이 이어지는 날개를


가졌으나 잃어버린 것

잊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것

슬픔의 다른 이름들에 대해


집이 조용히 불타고 있다


고마워요 이 방에서

너무 오래 어두웠거든요


방문을 연 채 잠이 들었다

꿈속까지 부드러운 채들이 밀려들어왔다 - (이혜미 「도형의 중심」, 전문)

어제의 빗줄기를 풀어 스웨터를 짠다


습한 공기의 타래를 풀어 헤치면

간신히 꿈에 가까워지는 온도들

눈송이들, 새가 되려는


눈송이는 겨울의 파본

일렁이며 찢기다 금세 낱장이 무르는


엮인 공기들


비밀을 누설하는 목소리로

희게 엮인 그물을 빠져나오면

날숨으로 짜인 눈송이들이

공중에서 솟구치다 곧 흐려졌다


실타래가 풀려

새로운 면과 색을 얻듯

우리는 곁에 없을 때 사랑한다


얼음을 거느리고 순간을 말할 때

휘날리다 바래가는 색들의 목록

낱장으로 쌓이는 폭설의 밤들 - (이혜미 「겨울의 목차」, 전문)











상처가 된 아픔은 흉터로 남아 이젠 한없이 흐릿해

져서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럴

수록 어김없이 그 자리에 새살이 먼저 돋는 일이 거

듭된다 어느덧 그 시절도 다 지나 받아들여지는 것

이 내키지 않다 톺아보면, 모든 것이 찰나다 이처럼

사람의 기억 장치는 바보다 그래서, 다시 산다 십 년

을 이불을 덮지 않고 살았다 눈이 내린다 어쩔 것인

가 생각하는 사이, 불현듯 지난봄과 전혀 다를 낯선

봄이 미치도록 꽃 그림자로 펼쳐진다 - (윤희상 「열 번의 겨울과 열한 번의 봄」, 전문)

빠르게 아래로 흐르던 물이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북쪽에서 온 물과

남쪽에서 온 물이 만나

몸을 섞었다


깊은 밤 어둠 속에서도 그랬다

어떨 때는 몸을 섞는 소리가 달빛 아래 가득했다


이제, 어렴풋이 키를 맞추고

마음마저 붙잡았다


가까스로 함께 어깨를 겯고,

하나가 된 물은

다시 바다 쪽으로 흘렀다 - (윤희상 「두물머리」, 전문)












시를 읽는 오후는 부드럽다. 시를 읽는 오후는 따뜻하다. 시를 읽는 오후는 시와 나 단둘의 시간이다. 그래서 달콤하고 황홀하다.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순간이다. 친구와의 대화처럼, 친구와 나 사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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