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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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의 소설을 기다렸다. 규칙적인 모호함을 즐기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모호함은 안개처럼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 김엄지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문자나 기호로 존재하는 누군가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 그러니까 김엄지의 인물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일상의 한 부분을 포착해 그는 세밀하게 분석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장면들, 그리고 복잡한 내면의 세계.


작가정신 <소설, 향> 시리즈로 만나는 김엄지의 『겨울장면』은 단숨에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R로 지칭되는 남자와 아내, 회상 동료와 상사. 누군가의 죽음과 독백과 방백을 오가는 듯한 말들. 그것들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그건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고독의 몸부림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아내와의 불통.


그는 알지 못했다. 얼음호수의 끝을. 겨울의 시작과 끝을. 제인해변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다음 날 아침 제인호수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음을. 그 누구의 것, 자기의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마음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고. 기억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모든 것이다.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R은 생각했다. (75쪽)


친절하다고 볼 수 없는 김엄지의 문장은 몰입도를 높인다. 겨울장면이라는 제목처럼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반복한다. R에게 동화된다. 그와 아내는 제인해변에 갔고 식당에 갔고 그들에게는 폭죽이 있었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인물 묘사는 거의 없다. R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연령도 직업도 알 수 없고 성격도 모른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 혼잣말을 하거나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사람일 것 같은.


사람들이 호수 둘레에서 서서 하는 마지막 결심. 그건 결심이 아니다. 어떤 마음도 아니다. 다 지나간 후, 이미 끝난 것이다. 끝난 것을 끝내려는 것이다. 소리가 남고, 가라앉는 것은 물뿐이다. (131쪽)


어쩌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은 문장들. 마지막을 위한 여행을 떠난 부부의 모습, 혹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 떠난 이들의 흔적들. 하여 독자는 나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 모든 것이 R의 착각이거나 꿈이었다는, 남겨진 R의 쓸쓸한 후회. 날카롭고 차가운 겨울의 얼음호수에 혼자 선 남자. 삶에 대한 환멸, 살아 있음을 통증으로 확인하는 R. 그가 모르는 마음을 우리는 알까. 안다면 제대로 아는 걸까.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삶이다.


왜. R은 지쳤던가? R은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R은 R에게 지졌다. 매순간 R은 R을 버리지 못한다. (136쪽)


독특한 고유의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하는 김엄지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삶에 대한 무한대의 물음. 삶이라는 매섭고 날카로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서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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