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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되풀이 ㅣ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평점 :
잘 몰라서 더욱 매력적인 세계가 있다. 바로 시의 세계가 그러하다. 닿을 수 없기에 나만의 그릇에 담기라도 하고 싶은 욕망에 항상 시집을 찾는 것 같다. 어쩌면 황인찬의 시집을 읽는 일도 그런 나만의 방식은 아닐까 싶다. 황인찬의 시를 읽노라면 단조의 음악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부러 기쁨은 감추고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게 습관이 된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그건 황인찬의 시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황인찬의 고유한 무엇이라고 할까.
혼자만의 독백, 혹은 방백, 아니 고백처럼 들리는 시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뭐라 대답을 하고 싶어지는 거다. 시 속 너는 내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시인의 목소리에 뭔가 물어야만 할 것 같은 착각이라고 하면 맞을까. 이런 시를 읽노라면 아련한 기억 속 아담한 학교와 작은 운동장이 떠오른다. 그 시절 나와 편지를 나눴던 친구는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하는 막연한 바람 같은 게 쌓인다.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하고 괜한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놓았던 나의 편지는 사라지고 없겠지만 우리의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을 거라 믿고 싶다.
너는 장화
나는 화분
꽃바구니를 생각했는데
물병만 깨졌지
지난겨울 우리가
학교 뒤편에 묻어둔 비밀은
이제 썩어 없어졌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자
그럼 되잖아
마치 다음이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네가 분수, 말하자
한낮이 어두워지고
이제 우리에게 할 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여름 나는 불안
나는 망각 너는 모과
교문 너머에서
다음이 오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전문)
이런 시를 읽으면서는 그 새의 어떤 빛깔이었냐고 묻고 싶다. 새의 슬픔까지 온전하게 묻어두었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의 두려움과 슬픔을 말이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그래, 죽음은 멈춤이지. 호흡이 멈추고 손끝의 작은 움직임도 멈추고 머리를 채운 어떤 생각들과 가슴에 담김 모든 감정이 멈추는 일. 누군가는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다행일까. 그러니 이런 황인찬의 시를 읽는 일도 다행인 것이다.
며칠 전에는 새를 묻고 왔다
굳어가는 새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너는 정원을 청소하는 중이었고
죽어버린 새를
손에 쥐고 있는 내게
너는 뭘 하느냐 물었지
새가 멈췄어,
너무 놀라서 얼결에 그렇게 답해버렸다
그후로 무엇인가
자꾸 멈춰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이야,
그것은 잠자리에 들기 전 네가 했던 말이고
맞아, 그냥 다 생각이야,
이건 나의 생각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정원의 나무에는 새들이 많았다
날아가고 또 날아가도
새들이 다시 가지에 앉고,
또 어떤 새는 떨어지고, 그냥 그랬다 (「낮 동안의 일」, 전문)
천천히 시집을 읽으면서 여름과 여름 사이를 생각했다. 잔인한 여름과 성장하는 여름, 열매를 맺기 위해 바람과 뜨거움을 삼켜야 하는 어떤 나무들을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자두가 등장하는 시를 오래 읽었고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또 어떤 성장을 할까,” 란 시의 제목이 「재생력」이라서 나는 울컥했다. 황인찬의 시가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마치 그것 같아서 말이다.
다 함께 모여서 방학숙제를 했지
무슨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그것은 여름 내내 여러 마음이 엇갈리고, 지구의 위기까
진 아니어도 마을의 위기쯤은 되는 사건을 해결한 뒤의 일
아이들이 하나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이 장면은
불안하고 섬세한 영혼의 아이들이 모험을 마치고 일상을
회복하였으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모험을 통해 작은 성장
을 거듭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그런 여름의 대단원이다
물론 중간에 다투기 시작한 아이들 탓에 결국 숙제는 끝
내지 못할 테지만
뭐 어때, 숙제는 언제나 남아 있는 거잖아(웃음)
사건 이후에도 삶은 이어지고
마을은 돌아가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거야
여름 내내 모험에 도움을 주었던,
온갖 사물에 깃든 신령들에게 마음속으로 안녕을 고했지
지금의 일상을 소중히 하자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결국 애들은 싸우기 시작하고,
한참을 씩씩대다 서로를 바라보다
다 함께 웃는 것으로
이 장면은 끝난다
그리고 기나긴 스태프롤
검은 화면을 지나면
다시 첫 장면이다
앞으로 벌어질 마음 아픈 일들을
알지 못하는 방학 직전 어느날의 교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또 어떤 성장을 할까,
그것을 궁금해하며
카메라는 천천히
여름의 푸른 하늘을 향해 움직인다 (「재생력」,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