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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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래도 된다고 여겼던 사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나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다. 괜찮게 지속되는 일상이 누군가의 수고로 채워지고 있다는 걸 잊는다. 그게 그 사람의 본연의 임무도 아닌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무언가를 원하고 다른 곳을 꿈꾸는지 묻지 않는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이름은 엄마이거나 언니이거나, 혹은 집안의 누군가일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잊은 채 이모로 언니로, 장녀로 살아온 김이설의 소설『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속 화자 ‘나’도 다르지 않다.


“언니는 글을 쓰고 싶은 거지?”

나는 처음으로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걸 밝혔다. 티끌보다 더 작은 것이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안간힘으로 중력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연하디연한 작은 싹과 같은 나의 희망에 대해서.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했다. (63쪽)


어느 순간 집안의 살림을 살고 있는 ‘나’. 재수를 했지만 대학에 가지 못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합격하지 못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그런 나에게 글을 쓰고 싶은 거 아니냐고 물어준 동생, 다시 공부를 해보라고 말해준 동생이 고마웠다. 그러니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동생과 조카를 구해야 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동생의 인생은 다시 시작해야 옳았다. 엄마, 아빠, 동생, 모두 일을 해야 했기에 조카를 돌보는 일이 자신의 몫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두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거저 이뤄지지 않는다. 온전한 정성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3년을 넘겼고 나는 마흔이 되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늦은 나이에 시 창작을 배웠고 등단을 위해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시를 쓰기 위해 시를 읽고, 필사를 하던 밤이 있었다. 연인도 있었다. 시를 배우고 공부하던 시절,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준 남자. 계절마다 안부를 묻고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 동생의 연애를 보면서 그가 생각난다. 두 아이의 엄마지만 젊고 예쁜 동생의 사랑을 지지하면서도 뭔가 화가 난다. 모든 것에 자신감을 잃는다. 무엇보다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가 없다. 아니, 시를 읽고 필사를 할 여력이 없다. 두 아이와 일하는 동생에게 방을 내주고 거실이 나의 공간이 되었다.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시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나에게 시를 쓰는 밤은 도착하지 않았고 필사 노트만 두꺼워졌다. 엄마와 여동생과의 갈등이 조금씩 커졌고 나는 지쳤다.“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란 아버지의 말은 화자인 ‘나’에게 또 다른 ‘나’에게 격려이자 빛이었다. 그러나 고단하게 이어지는 하루하루, 그 어딘가에 내가 꽃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자꾸만 커지는 열패감을 걷어낼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다시 만난 연인.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는 집을 엄마와 동생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말한다. 지난했던 시간의 낡은 빌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더 늦기 전에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일 년이든, 한 달 이든, 단 하루든,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딸에게 아이들은 어쩌냐는 엄마의 질문이 너무나 서글프다. 그래도 ‘나’가 뜻을 굽히지 않고 집을 나와서 방을 얻고 살아가서 기쁘다. 뭔가 대단한 걸 이루지 않더라도 설령 그녀가 시를 쓰지 못하더라도 잘 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짙은 초록색으로 변한 이팝나무 이파리에 관해. 거짓말처럼 맑았던 그날 새벽하늘을 지나갔던 검은 새 한 마리에 대해서. 아무도 울지 않았던 그 밤에 대해서. 엄마의 꽃무늬 블라우스에서 맡아지던 나른한 살냄새와 동생의 품에서 꼬무락거리는 스무 개의 손가락과 스무 개의 발가락에 대해서. 그 손과 발이 잡아당긴 생의 끈질긴 얼룩과 여름 소나기에 대해서, 그 소나기 끝에 피어오르는 흰 구름에 대해서. 그 해의 열대야에 대해서, 깊고 오래된 골목길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운 사람의 그림자와 나의 눈물과 우리의 정류장과 모두의 무덤에 대해서. 서로의 체취로 속삭이던 노래와 지리멸렬한 계절에 속박되었던 오해와 피우지 못한 꽃과 기꺼운 약속과 작은 책상에 낡은 베갯잇과 차마 다하지 못한 희망과 나는 지금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하여. (171~173쪽)


온전히 나를 찾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루를 고스란히 그녀를 위해 쓸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시를 통해서 그녀가 회복될 수 있으니까. 스스로 부족하다고 잘못된 삶을 살았다고 자책하지 않는 시간이 올 거라 믿으니까. 그녀가 자신만의 언어를 찾고 채워가는 시간이 꽃으로 필 거라는걸. 그게 어떤 꽃이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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