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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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학위, 명예, 성공, 지적 성취감, 이런 거창한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끝에는 밥벌이가 있을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상의 공부를 하고 그다음은? 취업이 있다.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결과를 내고 그에 합당한 급여를 받는 일. 언어를 가르치고 언어를 배우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한 나라의 언어에 반하여 그 아름다움을 익히고 싶어서 어학당을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최소한 소통을 위해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타국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서수진의 『코리안 티처』속 어학당 학생도 그랬다. 취업을 위해 한국어학당을 찾았다. 불법으로 취업을 했고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하는 이들도 적었다. 그들을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 사이에는 못한 갈등이 발생한다. 당연한 일이다. 언어를 배우고 있지만 완벽하게 소통할 수 없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고학력자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자부심으로 좋은 선생이 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3월마다 계약서를 갱신하는 계약직, 시간 강사일 뿐이다. 『코리안 티처』는 H대 한국어학당을 배경으로 비정규직 강사 선이, 미주, 가은, 한희 네 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학기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학당 강사인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을 붙잡고 가르치는 건 둘째치고 어학당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 강평(강의평가)도 높고 학생들에게 인기도 좋아야 한다.


신입 강사 선이는 베트남에서 온 특별반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진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학생들의 고충을 알아주며 한국어를 잘 가르치는 선생님 말이다. 동료나 선배 강사, 그리고 책임강사와도 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타 대학의 어학당에도 강의를 나가는 강사들 옆에서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학생들이 선이의 사진을 인스타에 올린 걸 확인하고 어학당에 알리고 개선과 해결을 요구한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만 같았다.


그런 선이와 가장 다른 사람은 미주였다. 이미 8년차 강사였고 어학당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대체로 무시했다. 교재나 수업방식, 서류 업무에 대해 기본만 지키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선이와 같은 입장이지만 당당했다. 학생들과의 관계가 가장 힘들 뿐이다. 대책 없이 200명의 베트남 학생들을 데려오고 어학당을 돈벌이로만 여기는 원장과 학교를 상대로 싸우고 싶었지만 미주 역시 참아야 했다. 이곳은 미주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직장이니까.


우리는 정이야. 학생이 갑이고, 당신이 을이고, 바로 옆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책임 강사들은 병이고, 나와 같은 평강사들은 정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강평으로 우리를 자르겠다고 위협하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거고, 여기 있는 강사들은 위협당하는 대로 당신 비위에 맞춰 멍청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야. 나 역시 마찬가지고. (121쪽)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어쩌면 인기 강사인 가은을 향한 시선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옷차림이나 외모에서도 자신감이 보였다. 가은은 항상 강평도 1위였고 강사들과 관계도 좋았다. 다른 강사를 의식하지 않았다. 스스로 운이 좋은 편이라 여겼다. 재계약에 대한 걱정은 없었고 학생과 동료에게 잘 베풀었다. 나중에 신입 강사 선이가 학생들이 올린 사진 문제로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고 놀란다. 가은은 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다. 가은에게 이보다 좋은 직장은 없었다. 그만 둘 이유가 없었다.


선이, 미주, 가은과 다르게 한희는 책임강사였다. 말 그대로 다른 강사와는 다른 위치였다. 겨울학기를 마치면 무기계약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강평은 낮았고 임신 초기에 무리를 해서 쓰러졌다. 어쩔 수 없이 휴직을 선택한다. 그래도 아침마다 단체방을 통해 어학당 상태를 확인한다. 한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학당에서 베트남 학생들 대신 중국인 학생들을 데려오고 이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자 자원했다. 한희에겐 일이 필요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남자친구가 일을 그만두고 월급도 받지 못했다. 한희가 나서야 했다.


한희에게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은 과거였다. 미래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라고 현재를 끌어와서까지 미래를 확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한희의 의지와 예상은 늘 배반당했다. (221쪽)


네 명의 강사를 통해 한국에서 여성으로 일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새삼 확인한다. 고학력의 여성 인력이 현장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무참함이 전해졌다. 소설 속 그녀들뿐일까. 생계를 위해 일선에 나선 수많은 여성들, 기혼이며 아이가 있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부당한 일이 많을까. 현재를 지탱하느라 급급해서 계획을 세우거나 수정할 수도 없었던 삶이 여기 있었다. 넘어졌다고 주저앉는 게 아니라 일어서는 여성의 삶 말이다. 저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한희를 통해 보여준 한국어의 미래 시제에 대한 것이다. ‘한국어’라는 단적인 표현이지만 삶의 미래를 제시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희에게는 미래 시제가 필요했다. 온전한 미래가 필요했다. 의지에도, 추측에도 기대지 않는 하나의 완전한 사실로 존재하는 미래가 필요해졌다. (중략) 한희는 의지 양태도 추측 양태도 아닌 시간으로 미래를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이다. (223쪽)


무리하게 어학원에 출근을 해서 조산을 한 한희가 스스로에게 필요한 미래를 떠올리며 다짐하는 부분에 나는 울컥하면서도 한희를 응원하고 있었다. 소설 속 네 명의 강사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명확한 미래가 다가오기를 희망한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일하는 여성 모두에게 그러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들이 살아온 아파트가 서 있었다. 아침 해가 잘 들고, 한희가 아끼는 고무나무 화분이 있는 곳. 이제는 그곳에서 아기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한희는 지금 아주 분명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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