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이 세계에 영구히 남기 위해 박물관에 보존되는 거죠.” (150쪽)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를 누군가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현재가 아닌 미래에 그것이 발견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물건의 가치,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건 누군가의 부재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사용하던 방에서 내가 느꼈던 어떤 감정, 낡고 보잘 것 없는 아버지의 유품에서 아버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아둔한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잘 알려진 오가와 요코의 『침묵 박물관』을 만나면서도 나는 그랬다. 죽음 후의 삶, 남겨진 이들에게 유품은 어떤 의미일까.


다양한 박물관을 만들었던 기사는 한 노파의 의뢰를 받는다. 그녀가 원하는 박물관은 놀랍게도 자신이 모은 유품을 전시하는 것이다.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 박물관은 결국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을 전시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 유품을 직접 모은 이가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작은 마을, 괴팍한 노파는 기사에게 친절하지 않다. 노파의 어린 딸인 소녀가 어머니의 성격에 대해 설명하고 사과한다. 소녀와 대대로 집안의 정원사인 남자와 그의 아내가 그를 돕는다.


노파가 수집한 유품은 죽은 자의 삶을 대표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남겨진 모든 것들이 유품이지만 노파가 원하는 건 단 하나의 물건. 기사는 노파가 모은 오래된 유품을 소독하고 정리한다. 그리고 전시실에 어떤 형태로 전시할지 고민하고, 노파가 들려주는 유품에 대해 기록한다. 기사에게도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 있다. 어머니의 서명이 있는 『안네의 일기』다. 기사는 잠들기 전 그 책을 읽는 습관이 있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있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유품을 소독하고 정리하는 단순한 일상은 어느 날 기사는 소녀와 함께 형을 위한 선물을 사러나간다. 갑자기 폭발 테러가 발생하고 소녀가 다친다. 광장에서 침묵 수행을 하던 침묵 전도사는 그 사건으로 사망한다. 평온했던 마을은 테러 사건과 살인사건으로 불안이 감돈다. 그와는 별개로 노파는 죽은 자의 유품을 기사에게 수집하라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의 유품을 가져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유가족 동의 없이 훔치는 일이라니. 기사는 죽은 자의 집과 일터를 방문하면서 그의 일상을 상상한다. 살아있을 때는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삶을 생각하는 과정은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기사와 마찬가지로 독자인 나에게도 말이다.


독특하고 기묘한 소재의 이 소설은 노파가 완성하려는 침묵 박물관과 침묵 전도사를 통해 침묵을 다룬다. 수도원에서 침묵 전도사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하는 소년이 점점 말을 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침묵은 곧 단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침묵과 죽음은 동일한 의미로 다가온다. 완결 상태의 침묵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남겨진 유품만이 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된다. 그러니 노파의 말처럼 유품은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유품은 있는 그대로여야 해. 쓸데없이 손을 대는 건 망자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어. 자네 일은 보존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보존이라고. 자신만의 지식이나 감각이나 아이디어를 살리려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처리란 말이야. 알겠어? 자네에게 부족한 건 겸허함이야. 아무리 하찮은 유품이라도 경외심을 갖고 가슴에 품으려는 겸허함이 없으면 박물관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아.” (90쪽)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고, 그리고 가치가 있어. 유품 하나하나가 그렇듯이.” (143쪽)


수집된 유품 하나하나가 간직한 가치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유족과 죽은 자를 아는 이라도 그의 삶에 대해 알 수 없듯 말이다. 그럼에도 침묵으로 가득한 공간, 그 안에 전시된 수많은 유품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느낄지도 모른다. 침묵을 통해 전해지는 소란스러운 삶의 온기를. 조금은 이상한 소설이다. 왜냐면 죽은 자를 불러오는데 슬픔보다는 그들과 함께 한 따뜻한 기운을 만지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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