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클로이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사회이든 구성원은 다양하다. 저마다의 개성과 사연이 있다. 하나하나 특별한 삶이다. 그러나 그 특별함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잘 알지 못했을 때, 알려고 하지 않았을 때 그렇다. 한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옆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그러하다. 눈 인사를 할 정도뿐 더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다. 택배가 잘못 배송되었을 때에나 벨을 누른다. 이사 온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무언가 공유할 게 없다. 점점 개인화가 되는 사회, 모든 게 자동화되고 온라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 그 뒤에는 삭막하고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더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수동으로 작동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라니. 과연 가능한 일인가? 


맨해튼 5번가 12번지에 그런 아파트가 있다. 9층을 오가는 엘리베이터는 오직 승무원의 작동으로만 움직인다. 세대별 호출에 따라서 승무원 디팍은 엘리베이터를 운행한다. 그는 39년 전 인도를 떠나 미국에 왔다. 그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매우 만족하며 아내 랄리와 살고 있다. 그를 대하는 고급 아파트의 입주민 모두에게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5번가 12번지의 9층 아파트에는 다양한 입주민이 살고 디팍은 그들의 성향을 잘 안다. 앵무새를 키우며 혼자 사는 노부인은 친절하고 매일 술에 취해 귀가하는 남자는 현관문을 열어줘야 한다. 어디든 항상 붙어 다니는 프랑스 부부, 외국인을 혐오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칼럼니스트와 9층에 사는 하반신 장애를 가진 클로이와 교수 아버지까지. 매일 엘리베이터를 다고 내리는 그들과 디팍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 클로이』란 제목 속 클로이와는 어떤 사이일까. 어쩌면 이런 짐작을 할 수도 있다. 뉴욕 맨해튼의 고급 아파트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르크 레비의 『그녀, 클로이』는 수동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특이한 아파트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디팍은 어쩌다가 미국으로 떠나왔는지, 소설의 제목인 동명인 클로이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매일 반복적으로 엘리베이터를 조작하는 디팍의 일상에 비친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인도 뭄바이에서 온 디팍의 처조카 산지와 클로이의 만남까지 다채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도에서 스타트 업 기업의 대표인 산지는 투자를 받기 위해 뉴욕에 왔다. 처음 만나는 고모와 고모부에게 인사만 전하려 했지만 고모의 배려는 거절하지 못한다. 고모 랄리의 집에서 머물면서 투자자와 미팅을 갖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궁금하다. 클로이와 산지는 어떻게 만나게 될까. 클로이는 오디오 북 성우의 오디션으로 바쁘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에게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연히 공원에서 만난 남자 산지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거기 있기에 산지가 그곳으로 갔다는 사실도 말이다.


맨하튼 5번가 12전의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승무원은 디팍과 야간 근무자 리베라 둘이다. 리베라가 사고로 입원을 하면서 산지가 디팍을 도와 임시로 운전을 하게 된다. 낮에는 투자자를 만나 사업 설명을 하고 밤에는 승무원을 하는 것이다. 아파트 주민 일부는 이 기회에 엘리베이터를 자동으로 바꾸기를 원하며 그동안의 디팍의 수고를 무시한다. 디팍을 존중하는 건 클로이와 교수, 노부인 정도로 대세는 자동화로 흐른다. 디팍은 남은 기간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산지도 그러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디팍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것이다. 클로이는 아파트에서 산지를 보고 놀라면서도 반갑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고 왜 이곳에 왔는지도. 보이는 게 상대의 전부는 아니지만 보이는 것 역시 그 사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왜 엘리베이터 운전을 했죠?”

“당신을 쫓아다니지 않고 밤마다 가까이에 있으려고.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의 휠체어만 본다고 확신했고, 나 역시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들이 있거든요.”

“뭐가 두려운데요?”

“나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까요.” (315쪽)


매일 같은 자리에서 일하는 이들을 생각한다. 디팍의 수고는 우리 주변 그 누군가의 그것과 같다. 클로이의 휠체어 역시 그러하다.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클로이의 삶을 지켜본 디팍과 산지처럼 그런 존중이 필요하다. 그녀가 직접 자신에게 일어나 일을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소설 속 그녀가 아주 천천히 말해주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모두가 궁금하지만 섣불리 묻거나 판단을 내리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처가 되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인도에서 온 산지를 향한 클레이의 시선, 휠체어를 타는 그녀를 바라보는 산지의 진심이 서로를 빛나게 만드니까. 


적절한 유머와 적절한 재미, 거기다 감동까지 갖춘 완벽한 소설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그녀, 클로이』가 그런 소설이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사는 맨해튼 5번가 12번지, 그 안에서 펼쳐지는 마법 같은 이야기. 당신이 기다렸던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