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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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이에게서 혹 만난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횟수가 적지 않다. 호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불쾌하다. 특별해지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특정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편해하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상대는 학교나 직장, 지역에 대한 질문을 계속한다.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은 좋은 일일까. 아무런 정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은 어려운 것일까. 가만히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린다. 이름, 성별, 나이, 고향, 가족관계,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로 시작한다. 다른 건 무엇이 있을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나열, 친구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들, 이 정도뿐 더 확장되지 않는다. 상급 학교에 진학했을 때, 사회생활을 하면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지금의 나에 대해, 나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지 않았고 돌아가시기 전 약간의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냥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다. 『출신』의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나라에서 성장하고 그곳에서 원하는 삶을 살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이력을 가질 수 없었다. 열네 살의 나이에 1992년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난민 출신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현재의 나를 이야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과거에서 이어진 나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살아오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야 한다. 때로는 상처와 아픔이 나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것은 친절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삶에 있어 불친절했던 시간들을 소환하는 일, 그것이 바로 출신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현재 2018년 3월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화자인 ‘나’가 독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이력서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자필 이력서를 쓰는 ‘나’가 기억하는 과거는 같은 듯 다르다. 할머니의 기억에는 ‘나’가 태어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비셰그라드의 모든 것이 있다. 용을 퇴치한 전설이 있고, 조상들을 묘신 공동묘지가 있고, 전쟁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춤을 추는 모습,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 사촌들과 놀았던 선명하지 않은 기억이 있다. ‘나’는 그곳이 아닌 독일에서 보낸 날들에 대한 기억이 촘촘하게 박혔다.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낯선 곳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에 둘러싸여 사춘기를 보내야 한다면 어떨까. 다시 처음부터 독일어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면서도 적응하면 할수록 더욱 살아나는 이방인이라는 자각은 어쩔 수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집 안에는 재활용 쓰레기 더미에서 구한 물건이 있고 힘들어하는 부모님을 마주하는 일은 열네 살 소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상이 아니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하루하루 공사장을 전전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기에 더욱 방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낸 시절이 나쁜 건 아니다. ‘나’와 같은 형편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그대로 이해하고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 아지트였던 아랄 주유소에 모였던 이들, 여자친구 리케,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치아를 치료해 준 하이마트 박사. 어디서든 하루를 견디고 지탱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했다. 나쁨이 아니라 좋음, 절망과 분노가 아니라 단순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그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편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 공격적이고 야만스럽고 불법적이지 않은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알뿌리와 싹, 다른 식물에 붙어사는 식물. 엄밀히 말하자면, 본의 아니게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없는 우리는 어디에 있든 늘 하던 대로 행동하면서 계몽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210쪽)

 

나의 반항은 출신의 숭배뿐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속감은 지지했다. 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었다.(295쪽)

 

결국엔 그 모든 것이 ‘나’를 도왔고 완성시켰다. 나를 이야기한다는 건, 나를 존재하게 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인 ‘나’가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과거를 함께 탐험하고 그것을 기록하면서 점점 자신의 뿌리에 대해 다가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발견하는 건 당연하다. 할머니에게 이끌려 방문한 오스코루샤에서 만난 친척 가브릴로 노인에게 듣는 이야기가 나의 역사인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조상들의 이야기와 상상할 수 없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 그 모든 것이 ‘출신’이다. 조금은 복잡하고 난해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은 이 두 문장으로 가장 완벽하다. 설명할 수 없는 뜨겁고 거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이 뛰쳐나와 온전한 형상으로 존재한다고 할까.

 

나의 할머니가, 그리고 할머니만 볼 수 있는 거리의 소녀가 바로 ‘출신’이다. (88쪽)

 

어머니에게 출신은, 고향 땅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움찔하는 몸짓 같은 것이다. (162쪽)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건 아니다. 치매로 인해 과거를 헤매다 죽음을 맞는 할머니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전히 부재로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는 소중한 이가, 누군가에게는 특정한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것으로 채워진 어떤 공간이, 누군가에는 어떤 나라가 그럴 것이다. 사샤 스타니시치의 소설을 통해 나의 근원을 돌아본다. 내가 놓친 그것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남긴 사진을 찾는다. 나와 닮은 구석은 어디인가, 전혀 나 같지 않은 얼굴과 표정. 어떤 과거를 살았든 여기저기 부유하는 시간을 보냈든 중요한 건 그들이다.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나의 출신이다. 존재의 시작은 어디인가, 끊임없이 묻고 고뇌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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