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넘어진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덤벙거려서 그렇기도 하고 건강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넘어졌다고 해서 모든 게 나쁜 건 아니다. 넘어졌던 기억이 있기에 조심해서 걷고 넘어졌을 때 기분을 알기에 누군가 넘어졌을 때 더욱 신중하게 살필 수 있다. 경험으로 비추어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의 상황에 대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지혜는 자연히 따라오는 거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깊은 사유와 성찰 그리고 감사가 필요한 일이었다.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읽고 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정갈하면서도 담백한 글로 일상을 기록하는 힘, 그건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니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고 해서 쉽고 편안하게 쓴 글은 없을 것이다.

 

쓰기는 파편투성이 뒷방을 하나하나 구석구석 치워가는 일이다. 눌려서 올라오지 않는 건반에 남아 있는 손가락 끝의 정한을 더듬는 일이다. 쓰기는 내 안의 내 밖의 잡초 무성한 꽃무덤을 도굴하는 일이다. (78쪽)

배혜경의 『화花영影시時경景』에서는 그런 글의 민낯을 볼 수 있다. 하나의 풍경, 하나의 기억을 꺼내 단정하게 정리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할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면면이 특별하고 신비롭게 다가온다. 거기다 글과 어울리는 사진까지 마주할 수 있어서 어느 순간에는 그 사진에 가만히 집중하는 나를 발견한다. 저자와 그의 일상 언저리의 풍경은 마음은 평온하게 한다. 어떤 사진은 속상하고 복잡한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라고 말하는 듯하다. 꽃과 나무 바람, 그리고 작은 고양이들이 그랬다.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생각을 담은 사진일까. 내가 그 순간에 그 풍경(사물)을 보았더라면 나는 무슨 생각을 곁들이고 싶었을까.

 

단순함이 가장 좋은 거라고 여기면서도 단순하게 만들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어떤 과정을 통과해야만 단순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하려는 듯. 그리하여 모든 일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진정한 단순함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한 사람에 대해 알면 알수록 견뎌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오히려 그에 대해 더욱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이런 문장을 유독 더 집중하게 된다.

 

나만 그럴까. 모두 고양인인걸. 누구나 고양이와 사는 것처럼 외롭지만 자주 가슴 벅차고 누군가 고양이인 것처럼 겁나지 않은 척 용감하게 살아내고 있는걸. (99쪽)

우리 안에는 모두 자신만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구나 싶었다. 때로 감정을 숨기고 거짓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슬그머니 옆을 지키는 고양이. 친한다는 이유로 쉽게 무례를 범하면서도 상대가 그렇게 다가오면 불쾌감을 감출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두렵다. 나를 표현하는 것들에 대해 신중하고 조심성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표정과 행동이든 말이다.

가깝다는 이유로 삼가지 않고 자신 있는 일이라 하여 가볍게 덤벼들진 않았는지 돌아본다. 사람을 대할 때뿐만 아니라 생을 대하는 순간마다 몸을 낮추어 조심스레 대하는 자세를 잊지 않아야겠다. (164쪽)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저자에게는 특별한 이력이 있다. 그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도서 제작을 위한 낭독봉사이다. 나눔과 봉사는 진정한 실천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책에는 낭독 녹음에 관련된 글도 만날 수 있다. 다른 이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책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전달과 함께 그 안에 담긴 감정들도 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책을 고르고 낭독을 위해 연습했을 수많은 시간의 수고를 상상하면 그저 놀랍고 감탄할 뿐이다. 13편의 책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익숙한 제목의 소설과 함께 나를 붙든 건 이홍섭 시인의 『터미널』에 대한 부분이었다. 시집 한 권을 녹음하는 일은 3시간 정도 한 호흡으로 작업해야 한다고 한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든 연속성을 지닐 때, 지난다고 생각될 때 애초 우주의 영원한 미아로 낙하한 인간은 마음이 놓인다. 친밀감의 비밀은 연결성 있다. 떨어져 있지만 항상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외로움을 천형으로 안고 사는 인간에게 무한한 위로가 된다. (218쪽)

어딘가 잠시 머물렀다 떠날 수 있는 공간, 터미널을 생각하니 시장이 떠올랐다. 생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떠나고 돌아오기 위해 분주한 터미널처럼 사람들의 생기가 가득한 그곳. 울적할 때마다 시장 골목을 서성이던 시절도 겹쳐진다. 한 장의 사진과 한 줄의 문장이 나를 먼 곳으로 데리고 간다. 책이 이끄는 방향의 끝에는 언제나 삶이 있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괜찮다. 어느 곳에서는 나와 닮은 삶이 있고 어느 곳에서는 내가 알 수 없는 삶이 있다. 하루하루 지나온 풍경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풍경을 기대하는 우리의 삶.

‘꽃그림자 드리운 시간풍경’이란 뜻의 제목처럼 어디든 생이 존재하는 곳에는 저마다의 꽃이 필 것이다. 우리의 삶이 꽃을 피워내기까지의 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터. 누군가는 그 시간을 견디고 누군가는 막연히 기다리고 누군가는 지켜볼 것이다. 우리 삶의 꽃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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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4 1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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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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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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