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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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는 모호해요. 각자 나름대로 현실을 인식하고, 믿는 걸 나름대로 정의해가는 수밖에 없어요” (167쪽)

 

기이한 경험을 했을 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선뜻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상대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까 두렵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믿어주지 않고 상상이나 착각이라고 타박을 놓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 현상을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야마시로 아사코의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애써 슬픔을 감춘듯한 표지처럼 뭔가 비밀스러운 공포를 전해준다고 할까. 놀랍게도 그 공포는 피하고 싶은 두려움보다는 가만히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순간 서서히 옅어진다.

8편의 이야기 모두 흥미롭다. 부부에게 동시에 나타난 혼령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이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부모를 잃고 이모에게 학대를 당하는 소녀와 소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머리 없는 닭에 대한 애처로운 이야기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여자 친구가 술을 마시면 잠깐 동안 미래를 볼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도박에 이용해 결국엔 파국에 이르는 「곤드레만드레 SF」,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 중고 이불 덕분에 재기에 성공한 소설가의 사연 「이불 속 우주」, 과거의 잘못이 현재의 삶을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날리는 섬뜩한 이야기 「아이의 얼굴」, 2011년 대지진으로 아들과 아내를 잃은 남자가 무전기를 통해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무전기」, 이혼한 남편에게 딸을 보여주러 나갔다가 남편이 딸을 데리고 도로로 뛰어들어 동반자실을 한 모습을 목격한 후 정신이 이상해진 아내의 일상을 담은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침몰하는 배에서 죽음을 맞이한 화자가 천사를 만나면서 경험하는 생과 사의 경계를 다룬 「잘 자요, 아이들아」까지 색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저마다 놀랍고 잔혹스러운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소설 속 인물의 슬픔과 상처에 다가가게 만든다. 꾸며낸 소설 속 상상의 한 장면이라 여기면서도 어느 세상에서는 현실의 한 장면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진한 여운을 남긴 몇 편을 소개하면 이렇다. 아동 폭력을 소재로 한「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에 등장하는 ‘후코”에게 머리 없는 닭 ‘교타로’는 유일한 친구였다. 자신을 미워하는 이모를 피해 몰래 교타로를 키우는 후코와 전학을 온 ‘나’와 친해지면서 닭을 함께 돌본다. 이모에게 후코가 무자비하게 살해를 당하고 ‘나’가 밤마다 교타로와 밤을 헤매는 모습을 상상하면 하나도 무섭지 않고 애처롭다.

나와 머리 없는 닭은 마치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하늘 아래를 가고 싶은 대로 나아간다. 아득히 넓고 쓸쓸한 세상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나는 머리 없는 닭과 함께 언제까지나 밤의 어둠 속을 헤맨다. (72쪽)

 

아들과 아내를 지키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으로 술에 빠져 사는 ‘나’ 아들의 부서진 무전기를 통해 아들과 대화를 하는 「무전기」는 더욱 애틋하다. 술에 취해서 들리는 환청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무전기를 버리지 못하고 위로를 받는 그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아키와 사귀면서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고 둘은 결혼을 한다. 아키는 결혼 후에도 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며 공감한다. 어쩌면 ‘나’에게 그 시간은 애도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잘 자요, 아이들아」는 침몰하는 배에서 사고를 당하는 과정이 우리가 모두 아는 그 사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사건이기에 그랬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는 영화관에서 자신의 지난 삶이 담긴 필름을 본다. 그러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모습이다. 천사가 자신의 필름을 잘못 가져온 것이다. 진짜 삶의 필름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배에서 사고를 당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주님이 있는 곳이 아닌 천사를 선택한다.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한 이별을 한 이들을 맞이하고 천상의 세계로 이끄는 일이다. 두렵고 무섭기만 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을 담았다. 언젠가 우리도 소설 속 천사를 만날 수 있을까. 그때 보게 될 나의 필름은 어떤 장면을 담고 있을까.

각양각색의 인생이지만 하나같이 축복과 비애로 가득하다. 모든 필름이 별처럼 반짝여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영상이 끝날 때마다 나는 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죽은 자의 나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이들아, 잘 자요.

사람들아, 잘 자요.

잘 자요, 편안하게. (256쪽)

고유한 슬픔과 고통을 견디며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가만한 위로를 안겨준다. 있는 그대로 슬픔을 바라보는 일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위안일 수도 있다. 애써 위로하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말이다. 이 단편집에서 느껴지는 정서가 그런 힘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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