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 - 모르는 영역
권여선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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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좋았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너무 좋아서 그 설렘을 나눠주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전달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권여선이라는 작가의 소설에 대해 나는 조금 과한 애정을 갖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과장된 애정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에 비하면 그의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쓰는 일은 몹시 힘들다. 이처럼 말이 길어지는 것도 그런 과정이 일부다.

 

19회 이효석 문학상 대상 선정작인 권여선의 「모르는 영역」은 과연 탁월했다. 조심스럽지만 이전의 작품과는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고, 나는 그 변화가 반갑고 기뻤다. 언제나 그렇듯 권여선의 문장은 날카롭고 아름다웠지만 그 안에 뭔가 세월의 흔적 같은 게 담겼다고 할까. 그러니까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게 보였다고 할까. 아무튼 내게는 그랬다. “해는 늘 낮달만 만나고, 그러니 해 입장에서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란 문장이 주는 기발한 울림. 역시 권여선이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 그 멀고도 가까운 사이를 관찰자처럼 그려나간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그 안에는 가족, 혈육, 세대가 있었고 서로 다름이 있었다. 이혼한 전처의 죽음과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 딸.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보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 그러니까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모르는 영역’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모르는 것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노력과 동시에 그냥 그대로 바라보는 일, 두 가지의 균형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소설에 등장하는 ‘낮달’이나 저수지의 ‘새’가 부여하는 의미를 자신의 삶에서 찾아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수상작과 함께 작가 자선작 「전갱이의 맛」은 역시 권여선의 단편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혼한 전 남편과 우연하게 만난 ‘나’는 그가 성대낭종 수술을 받고 한동안 회복을 위해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시간 동안에 그가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그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대해, 그리고 말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고 나의 말이 생겨난 배경을 듣는다. 이 소설은 말과 말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말이 필요한 시간, 말이 사라진 시간, 말이 생성되는 시간, 그런 것들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내게는 무척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나의 말은, 그가 힘주어 말했다.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기억되거나발견되는 거야. 내가 어떤 언어를 간절히 원했던 순간을 기억하거나, 그 간절함이 생겨나는 그 순간을 발견해서 내 말로 삼는 거지. 그러니까 내 말들은 어원을 잃는 법이 없어. 최초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위에 다른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말 속에 삶이 깃드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때로는 뜻을 알 수 없는, 그저 표현으로 먼저 생겨난 말도 있고, 가끔 아주 외설적인 말도 뛰어나와.” (66쪽, 「전갱이의 맛」)

 

어떤 말들은 뜻을 알 수 없는 채로 생겨난다고 그가 말했는데 정확히 그렇다. 어떤 감정이나 감각들은 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몸으로 표현되고 기억에 각인된다. (70쪽, 「전갱이의 맛」)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김미월의 단편 「연말 특집」은 김금희의 「세실리아」가 겹쳐지지도 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지난 시절 부끄럽고 무지한 행동에 대한 후회와 자책을 불러온다. 하지만 무겁지 않게 경쾌한 리듬으로 그려냈기에 김미월도 달라진 것일까. 나만 이 변화를 늦게 알아차린 것일까. 역시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김봉곤의 「컬리지 포크」는 자전적 글쓰기의 이어짐 같았고 김희선의 「공의 기원」은 제목 그대로 축구공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탄탄한 짜임새로 그려냈으며 최은영의 「이치다에서」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글로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말하고 있었다. 김연수의 「그 밤과 마음」은 한겨울에 읽으면 더 좋은 것 같다. 시인 백석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력이 독자를 눈 내리는 깊은 겨울밤으로 이끈다.

 

권여선의 소설과 함께 나를 가장 흔든 최옥정의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는 죽음과 대한 사유이자 삶에 대한 작가의 놀라운 통찰력에 돋보이는 소설이다. 조각가인 화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종이를 이어 만든 의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정작 그 의자는 앉을 수가 없다. 기능을 상실한 의자, 어쩜 그건 화자 자신의 분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암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에서도 소설을 굳건하게 쓴 작가의 집중력에 경이를 표한다.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며 써 내려갔을 소설.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좋은 소설을 읽을 수 있어 감사하다. 소설의 안과 밖으로 다양한 삶 속으로 나를 이끄는 작가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싶다.

 

생각보다 죽음은 조용하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더 놀라운 건 죽음이 굉장히 빨리 잊힌다는 사실이다. 저 사람이 없으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울부짖던 극도로 의존적이던 가족도 죽음과 함께 후다다가 자기 자리를 찾았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을 금방 자유롭게 했다. 죽음은 기다리는 일이 어렵지 막상 일어나면 그냥 일상일 뿐이었다. (252쪽,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

 

누구나 죽지만 죽을 때까지는 죽는 게 아니다. 비록 짧더라도 사는 동안은 살아야 한다. (253쪽,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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