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에는 돼지고기를 삶았다. 내가 수육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우리 집 냉장실로 옮겨 온 것이다. 작은 덩어리의 돼지고기가 품은 냄새 제거를 위한 재료는 없었다. 그 흔한 파, 양파, 깐 마늘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냉동실에 빻아얼린 마늘이 전부였다. 그래도 삶아야 했다. 냉동실의 마늘을 국물을 내는 멸치 망에 넣고 잠갔다. 강황가루가 있었고 된장이 있었다. 커피는 언제나 준비된 상태. 냉장실에 소주도 있었다. 그래서 노란 옷을 입은 돼지고기 수육이 완성되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고백하자면 살짝 냄새가 나긴 했다. 그러나 냄새를 감쌀 맛있는 갓김치가 있었다. 이 역시 누군가의 수고로 우리 집에 왔다. 먹을 때마다 그분을 생각한다. 다음에도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요리 아닌 요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재료는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조금씩 뭔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시도한다. 얼마 전에는 냉동실의 오징어를 잘 분해(?) 해서 오징어볶음도 하고 김칫국을 끓이기도 했다. 해 본다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양념장을 만드는 일, 비율이나 비법은 없다. 그냥 내 멋대로 한다. 그러니 실패했을 때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정말 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시도하는 건 나가는 일이다. 성공이나 실패를 걱정하지 않고 그냥 하는 시작하는 일. 읽는 일, 무언가는 쓰를 일도 그러하다. 나에겐 그게 필요하다. 시도하다 실패하면 속상하다. 당연하다. 나는 커다란 마음을 지닌 사람이 아니니까. 작은 점에서 시작해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나면 용기가 생긴다. 욕심내서 아주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찌그러지고 잘 그려지지 않아 화가 나기도 한다. 작은 동그라미에서 조금 더 큰 동그라미로 가야 한다.

 

누구는 어렵지 않게 돼지고기 수육을 만들지만 내게는 어려웠다. 파, 양파와 깐 마늘이 충분하게 있었다면 잘 해냈을 거라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러 번 반복하고 만들어봐야 잘 만들 수 있을 거다. 12월은 잘 만들지 못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는 달이다. 너무도 좋은 기억력 덕분에 12월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어제 수능 성적이 발표되고 당사자가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만족스럽지 못해 속상한 마음도 많겠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시작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것이고, 모두의 시작이 같을 수도 없다고. 아이들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있는데 후보작 이주란의 단편을 먼저 읽었다. 『모두 다른 아버지』에서 만났던 이주란이 아니었다. 등단 이력을 살펴보니 2012년이었다. 다른 후보작인 김혜진의 등단 연도와 같았다. 같은 시작이었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나가고 있었다. 시작점이 같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출발은 아니다. 무엇을 시작하든, 나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일, 어렵지만 그래도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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