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김사과를 떠올리면 그의 소설 속 인물 ‘영이’가 겹쳐진다. 작가와 인물은 창작자와 피조물에 불과한데도 그렇다. 그만큼 강렬했고 김사과를 각인시키기 충분한 캐릭터였다. 그는 소설을 통해 다양한 세계를 구축하고 인간의 추악한 본질을 담고자 노력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제목도 특이한 『0 영 ZERO 零』에서 나는 영이를 떠올렸다. 영이가 성장한 인물이 소설 속 화자인 ‘나’일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소설은 화자인 ‘나’와 남자친구 ‘성연우’가 헤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연애 소설이 아닐까 짐작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연애 소설이 아니다. 인간 본연의 지독한 욕망(어쩌면 악이라 부를 수 있는)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나’가 들려주는 자신과 관계된 인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나’가 교묘하게 접근하여 이용한 후에 목적을 달성했다 싶으면 과감하게 버리는 모습은 마치 인간계 먹이사슬을 보는 듯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밀인고 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 (46쪽)

‘나’는 명문대에서 독일 문학을 전공했고 번역가이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독립 문학잡지의 편집위원이다. 누가 봐도 부럽고 대단한 위치에 놓였다. ‘나’는 그것을 잘 일고 있었다. 자신이 자신 것들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지배할 수 있는지잘 아는 영리한 인물이다. 그래서 한눈에 제물이 될 상대를 알아봤다. 수업을 받는 박세영은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제법 글을 잘 썼고 욕망이 있었다. 재능에 대한 칭찬과 몇 번의 만남, 편집위원이라는 사실만 언급하면 그만이었다. 그것만 살짝 건드려주면 모든 게 뜻대로 될 수 있었다. 대학시절 동기였던 이민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불행을 바란다. 그것은 진실이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다.(…)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사람들은 누군가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120쪽)

 

‘나’​에게 그들은 그저 도구에 불과했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의 유산을 용의주도하게 아픈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이 받았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방치한 건 아니다. 주도권을 잡았을 뿐이다. 이처럼 ‘나’는 주변 인물과 환경을 살짝만 이용하면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상대가 나를 먼저 이용하기 전에 재빠르게 내가 덮쳐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상대가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치밀하게 그물을 던졌다. 그것은 때로 호위와 친절이었고 때로 지위와 권력이었다. 사실 ‘나’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며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나’의 행동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럴 자격이 있는 자 누구일까.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나 남자친구 성연우는 달랐다. 세상을 항한 ‘나’의 태도가 진심이 아닌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차렸기에 비난하고 분노했다. 어쩌면 가족인 엄마를 제외하고 자신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학벌과 부와 아름다운 허울에 감춰진 진짜 ‘나’를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소설에서 성연우와 전화로 싸우는 부분에서 ‘나’는 가장 인간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나’가 이제껏 자신이 구축해온 세계를 부수거나 빠져나갈 인물은 아니었다. 해왔던 대로 그대로 살아갈 거란 걸 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전진할 뿐이다. 설령 도착할 그곳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그것이 김사과만이 만들 수 있는 소설의 세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지독한 소설의 늪에 빠져도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인생은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응시하는 이 텅 빈 허공처럼 완벽하게 깨끗하게 텅 비어 있다. (187쪽)

 

*책의 말미에 평론가 황예인과 김사과의 대화를 통해 소설『0 영 ZERO 零』에 대해 한 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김사과가 추구하는 인간과 소설에 대해서도 만날 수 있어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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