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았던 비가 내렸다. 어쩌면 예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곧 장맛비가 내릴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는 건,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는 것과 닮은 기분을 데리고 온다. 좀 엉뚱하지만 허연이 만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읽으면서 책 속의 설국을 마주하면서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과 비, 그것이 주는 예민한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고 할까. 어쨌거나 이 책이 좋았다는 말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읽기도 전에 문장에 미혹된 소설이다. 알다시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니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거나 읽어보고 싶은 리스트에 담긴 소설이 아닐까 싶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되어 소설의 전체를 이끄는 소설은 많지 않다. 첫 문장을 시작으로 눈의 나라로 초대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생각하면 나는 기차와 하나가 터널을 지나고 있는 기분, 낯선 세계에 도착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번도 눈으로 가득한 땅, 그곳이 어디든 방문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아마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낀 이는 많을 것이다. 눈부시게 강렬하고 차가운 눈과는 반대로 뜨거운 태양의 계절인 여름에 만나는 설국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물론 헌연의 이 책은 설국 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은 오직 설국만 읽었기에 소설과 작가를 분리하는 게 불가능하다.  허연이 들려주는 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만나는 일,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 같았다.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내가 남긴 발자국을 바라보는 아득한 기분이라고 할까. 말이 많아진다. 기다렸던 책이라 그랬을까. 읽는 내내 지루함은 찾을 수 없었고 더욱더 가와바타 야스나리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이 책을 따라 여행을 할 수도 있고 눈의 계절에 계획을 세울지도 모른다.

​어느 겨울 저녁, 가까이 있는 산과 멀리 있는 산이 한꺼번에 성에 낀 기차 유리창에 비친 풍경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기차 안과 기차 밖, 속계와 선계의 경계에 비친 여인의 얼굴. 그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허무. 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나는 에치고유자와를 그리워하며 『설국』을 읽고 또 읽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읽을 때마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는 여인의 옆얼굴을 보는 듯하기도 했고, 때로는 바쇼의 하이쿠 한 구절에서 보여주는 소멸의 미학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떨 때는 전철역에서 펄럭이는 주간지의 속됨이 느껴지다가도, 어떨 때는 일본에서 처음 봤던 칠흑같이 엄숙한 장례식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게 『설국』은 깨달음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눈앞에 등장하는, 문을 열 때마다 이 문이 끝일 거라고 기대하지만 결국 또 하나의 새로운 문 앞에서 고개를 떨구게 되는 거대한 미로 같았다.

 

허연은 설국의 배경인 에치고유자와를 시작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이 꽃을 피운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그의 소설을 하나씩 설명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시인의 해설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완벽에 가깝다. 책은 언제나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데 설국이 여러 단편의 연작 형태였다는 것도 그렇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소설을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쓴 게 아니라 연작 형태로 시작했다고 한다.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을까 생각하니 아름다운 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가히, 최고의 문장이라 할 수 있는 도입의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고치고 또 고쳤을 테니 말이다.

 

책을 통해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인생에 대해 알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 일본의 문화적 흐름, 동료들과의 교류, 사랑까지 말이다.  설국을 비롯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다른 소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산소리, 고도에 대한 소개도 그렇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추구한 이미지와 소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까. 그런 것들을 허연은 하나씩 짚어준다. 특히『설국』에 대한 해설은 다시 소설을 꺼내들게 만든다. 주인공 시마무라와 두 여인 고마코와 요코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는 묘사와 대립에 대한 부분은 소설을 빛나게 만든다.

 

설국은 줄거리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설이다. 설국에 나오는 모든 배경은 일정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다. 시마무라가 살고 있는 도쿄라는 현실 세계가 아닌 터널 밖의 세계, 즉 에치고유자와라는 이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에치고유자와에 도착한 순간을 묘사하는 부분에 드러나는 이미지, 어둠 속 기차 차창에 비친 신비로운 이미지, 바로 그 이미지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반가울 책이겠지만 솔직히 나는 허연의 이야기가 좋았다. 위대한 문학 속 장치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고 할까. 시인이 만난 소설가, 설국의 고장인 에치고유자와에 대한 시인의 기대로 시작한 도입부터 여행의 묘미를 만날 수 있다. 고백하자면 지금껏 만났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가운데 제일 좋았다. 읽을수록 끝을 향하는 게 아쉬웠다. 그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인생을 채운 허무하면서도 외로운 분위기와 이전에 몰랐던 그의 소설에 대한 허연의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시작으로 누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까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은 죽음과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생은 부질없이 소멸하는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자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그가 자살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느껴진다. 나 역시 그의 죽음이 그가 살아온 생과 잘 어울린다는 허연의 생각에 동의한다.

 

살아 있어 느끼는 환희와 기쁨보다는 삶 자체에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고요한 허무가 그를 지탱했을 것만 같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와 다름없이 성장했고 파혼의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사라진 약혼자로 인해 비탄에 빠진 젊음, 문학이 있었기에 그는 살아갈 수 있었던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래서 그에게 체념은 체념이 아닌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체념의 힘을 알 것 같다. 내가 느끼는 체념의 깊이와 대가가 느꼈을 그것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체념한다는 것, 그리고 그 체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이 있다. 깊은 체념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 체념이 힘이 된다는 것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가 원고의 첫 행을 쓰는 것은 절체절명의 체념을 하고 난 다음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는 궁극이 있다. 궁극의 욕망, 궁극의 삶, 궁극의 관계, 궁극을 찾아간 그의 귀착지는 허무다.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인간의 생은 허무한 것이므로…….

 

존재함과 동시에 결국엔 소멸하고야 하는 생의 본질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 어떤 희망이나 행복을 발견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따라 허연은 그의 삶을 바라본다. 그가 태어난 집을 가만히 지켜보고 그가 걸었을 길을 걷고, 학창시절 다녔던 서점에 가보고 그가 마셨던 커피를 마시면서 그를 생각한다. 허무로 남은 생을 말이다. 닿는 순간 부서지고 마는, 부질없이 소멸하는 생에 대해서 말이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즐거움에 사색이 더해지는 시간이다.

 

온 세상을 순백으로 덮는 눈도 그러하다. 햇빛이 닿는 순간, 녹아버리고 만다.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만지고 그것에 닿기를 원한다. 겨울에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초여름, 설국으로의 초대는 반갑고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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