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밤
한느 오스타빅 지음, 함연진 옮김 / 열아홉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은 오묘하다. 낮과는 다르게 밤에는 새로운 감각이 살아나는 듯하다. 그건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분출된다. 같은 듯 다른 밤이 펼쳐진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밤은 더욱 그렇다. 밤의 분위기에 취한다고 할까. 분위기에 취해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나 잊어버린다. 반대로 누군가는 어떤 것을 얻기도 하고. 노르웨이 작가 한느 오스타빅의 『아들의 밤』은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진 소설이다.

 

내가 어른이 되면 우리는 기차를 타고 떠날 것이다. 되도록 아주 멀리. 창문으로 언덕과 마을 그리고 호수를 바라보며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말을 건넬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5쪽)

이혼한 젊은 엄마 비베케와 와 눈을 깜빡이는 틱 증상을 가진 어린 아들 욘은 4개월 전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왔다. 아직 이곳을 잘 모르고 낯설다. 엄마는 퇴근 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길 원하고 여덟 살 욘은 그런 엄마를 방해하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맞이하는 적막한 밤,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둘은 서로에게 다정하지 않다. 아니, 그런 여유가 없다. 마치 어겨서는 안되는 약속과 규칙처럼 서로는 그렇게 지낸다. 그러나 내일은 욘의 아홉 살 생일이니 오늘 밤은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 엄마는 아들 욘에게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묻거나 욘은 엄마에게 케이크를 준비했냐고 어리광을 부려도 좋지 않을까. 욘은 말 대신 조용히 집을 나온다. 엄마가 모든 걸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는 기대를 갖고 말이다. 옆집 할아버지를 방문하고 스케이트를 타는 소녀의 집에 놀러 간다. 온통 눈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차가운 밤은 빨리 도착하고 욘은 소녀의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따뜻하고 다정한 그 집에 더 머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기차 선물세트를 받을 아홉 살 생일을 생각하며 문을 열지만 열리지 않고 욘은 혼자 남겨진다. 엄마가 곧 올테니 욘은 기다릴 수 있다.  

 

손이 벌써 차가웠다.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소녀가 생각났고 잠든 소녀에게서 본 흰 눈동자가 떠올랐다. 진입로를 내려가 도로에 들어섰다. 그는 다음 날 통학버스를 타면 꼭 소녀를 찾아보겠다고 다짐하고 소녀를 발견하면 말을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21쪽)

욘의 생각과는 다르게 비베케는 이동식 놀이동산에 있다. 도서관에 갔다가 놀이동산이 마을에 들어온 것을 발견하고 거기서 일하는 남자 톰을 만나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어쩌면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그를 꼼꼼하게 살핀다. 혼자 외로웠던 날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욘이 집 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거라는 걱정은 아예 없었다. 그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단정하고 외출을 했으니까.

 

그녀는 톰과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가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생각했다. 그녀는 카운터에 기댄 톰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코로 조용히 내쉬었다. 그녀는 남자가 그런 식으로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그는 거의 잠든 것처럼 보였다. 순간 그녀는 침대에 누워 그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했다.(183쪽)

​기다리는 엄마는 오지 않고 낯선 여자가 욘에게 말을 걸고 차에 태운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마냥 엄마를 기다리는 것보다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순간 여자가 욘을 납치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밤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조바심이 났다. 다행인지 여자는 욘을 내려주고 자신의 길을 가고 욘은 혼자 눈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한다.

 

불빛을 받는 눈은 황색과 청동색을 띠고 있었고 움푹 패어 그림자가 드리운 곳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숲은 고요했다. 욘은 야간 조명이 있는 곳으로 간다면 그동안 자신이 두려워해온 일을 극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만 밟으며 발자국과 스키 자국 사이로 걸었다. 기차처럼 소리가 나도록 리듬을 넣어가며 숨을 쉬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겨우 반밖에 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멀리 있는 듯했다. 그는 오르막길이 나타나기 전에는 결코 앞을 쳐다보면 안 된다고 되뇌며 묵묵히 걸었다.(225~226쪽)

단 하룻밤의 이야기지만 아들과 엄마의 내면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쩌면 보통의 일상처럼 보이는 밤 일지도 모른다. 일에 치친 엄마가 원하는 휴식과 아들이 바라는 그것이 같은 지점에 닿는 순간은 수많은 감정의 교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외출을 끝내고 돌아와 아들의 잠자리를 확인하지 않는 엄마, 시시콜콜 모든 걸 엄마에게 말하지 못하는 어린 아들의 마음이 겨울밤처럼 시리다 못해 날카롭게 파고든다.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비극이라고 할까. 비베케의 외로움을 이해한다고 해도 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고요한 슬픔이 흐르는 밤이 사라지고 그들이 마주할 아침이 나는 너무 두렵고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