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하게 방문한 블로그의 글을 읽고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글에서 나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 내가 있었다. 내가 처한 환경과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 글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자책하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글이 주는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 힘을 키우고 싶은 사람이다. 어떤 목적을 향한 글이 아니더라고 그저 하나의 습관에 불과한 글이라도 쓰기를 소망한다. 그러니 시인의 산문과 시를 함께 마주할 수 있는 조각의 유통기한을 만난 건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저자 이지혜 시인의 시를 만난 적은 없다. 산문집 그곳과 사귀다를 읽었을 뿐. 하나의 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산문이라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각의 유통기한40편의 시를 위한 40편의 산문이 있다. 하나의 시와 하나의 산문이 짝꿍이 된 것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거나 어떤 감정을 추스르고 달래고 어루만져 기록하거나 그대로 두는 글.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 혹은 그들과의 다툼과 이별, 그리고 여행처럼 지나간 일상들을 마주한다. 마치 내가 이별한 것처럼, 마치 내가 떠나온 것처럼 마음을 당기는 글이 있었고 지나온 내 모습의 조각을 발견하는 것 같은 글도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멍하니 앉아 천장을 바라보던 순간, 그때 내가 다르게 했더라면 지금은 달라졌지 않았을까 하며 후회하는 어느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분명 저자의 감정이며 일상일 텐데 말이다.

 

누구나 완성되지 않은 마지막 조각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끼워 맞출 수는 있지만 맞추지 않는, 그 한 조각을 맞추게 되면 마지막 기대마저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조금 늦게 알게 됐다. 억지로 퍼즐을 맞추려던 나의 노력이, 억지로 기억 하나를 잃게 하는 일이었음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 어쩌면 약간의 착각과 환상이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는지도 모르는데. (산문빈자리의 거리중에서)

 

그때는 그때여야 한다고

그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 (서로가 그때에서 사라질 때일부)

 

하루의 마침표를 찍는 일기처럼 써 내려간 산문이 하나의 시로 이어졌다. 시를 쓰기 위한 워밍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일기 같았고 편지 같기도 했다. 어떤 순간을 기억하고 떠오르며 수많은 감정을 정리하는 순간의 고요가 느껴진다고 할까. 소설가의 창작 노트를 수록한 단편집이 즐거운 것처럼 시를 쓸 때의 배경을 상상할 수 있는 경험을 안겨준다. 40편이 시와 산문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더욱 와닿는 시와 산문은 문장에 대한 것이었다. 뒤죽박죽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가라앉은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었다.

 

문장의 힘, 모든 문장이 같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있어서였다. 추억이 되려고 쓴 문장에 자신이 더 아프다는 소설가처럼. 매일 글을 쓰지만 가끔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 쓰는 건지 어떻게든 써야 해서 쓰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도 쓰지 않는 것보다 나은 이유는, 분명 감정을 묶어둔 문장으로 살아갈 날들이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문장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흐르고 있다. 더 많이 쓰고 싶다. 어차피 잊히지 않는 시간 속을 사는 우리니까. (산문 문장의 힘중에서)

 

움직이는 감정을

묶어두는 것이

문장이라던데

 

문장의 세계란,

흐르는 것들 사이에서 흩어지는

우리에게는 달콤한 곳

 

‘4월에는 함께 하자

우리가 들어간 세계의 이름

고정된 세계에서는

흐르는 시간도 다시 고정되었다

 

이 세계에서 잘 살고 있는 걸까요

흐르지 않는 것이

가장 잘 흐르는 거겠죠

 

흩어진 것들이 다시 만날 때쯤

7월이 되었다

거짓말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입구만 있을 뿐 출구가 없었고

그런 세계에서는

계절이 숫자가 점점 많아졌다

 

움직이는 감정은

굳어지지 않으려던 계절

 

문장의 세계를 사는 법 (문장의 세계전문)

 

시를 사모하는 이에게 시를 쓰고 싶은 이에게 반가운 책이 아닐까 싶다. 시가 되는 순간과 마주하는 책, 하나의 생각 조각을 어떻게 발전하는지 한눈에 그 과정을 볼 수 있으니까. 나만의 시를 쓸 수 있는 무모한 용기로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40편의 시가 유독 만남과 이별, 사랑, 관계, 시간이라는 주제로 압축된 것 같아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독자에게는 신선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런 시를 찾고 있었던 이에게는 더욱 끌리는 책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급할 필요도, 서두를 필요도 없는 만남이 있단 것을. 생각보다 아주 작은 것이 인연의 속도를 정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연마다 제각각의 속도로 색깔로 이어진다는 것, 그래서 인연인 거다. (산문우리의 암호중에서)

 

불꽃이 틘다고 안심할 것도, 나뭇잎이 멈췄다고 불안해 할 것

도 없으니. 차차, 두고 봅시다. 우리 사이에 어떤 계절이 들어올

. 어떤 노래가 스밀지, 어떤 술잔이 오고 갈지 모르니까요.

, 기다립시다. 생각보다 아주 작은 것들이 우리 둘을 흔들지

도 모르니까요. 오늘 아침 보잘 것 없다고 내던진 것이 어쩌면

우리를 바꿔놓을지도 모르니까요. 차차, 혼자인 듯 그러나 혼자

가 아닌 듯 그렇게 알아갑시다. 허허, 차차는 참 외로운 말이지

만요. 흐흠, 차차는 참 조건 없는 말이지만요. 후후, 차차는 참

맹맹한 호흡이지만요. 혹시나 설마 혹시나 차차, 춤을 추다가도

못 만나면 다른 리듬으로 만나겠죠. 어쨌든, 오늘부터 차차! (차차전문)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정하고 시집을 읽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다 보니 시집을 집어 든 경우가 훨씬 많다. 어딘가에서 본 한 구절을 찾느라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구절을 찾느라고 읽었던 시절이 더 많다. 그 시를 찾느라고 읽게 되는 시집,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좋아서 자꾸만 읽게 되는 시집. 내가 먼저 읽지 못했던 시를 누군가 먼저 읽고 들려주어서 찾게 되는 시집이 더 많다. 시집 전체가 다 좋았던 적도 있지만 몇 편의 시가 좋아서 시집을 소장하게 된 경우도 있다. 시란 참으로 놀라운 힘을 지녔기에 그 힘의 능력을 믿기에 여전히 시집을 찾고 시를 읽는다. 최근에 가장 나를 흔드는 시집은 박소란의 한 사람의 닫힌 문이다. 잘 알지 못하는 시인의 시집이다. 단지 제목에 이끌려 곁에 둔 시집이다. 그리고 이런 시에 꽂혀 계속 반복해서 읽는다. 어쩌면 나는 이 시를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한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것을 잃은 후

이제 나는 그 어떤 것도 잃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잃을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느 일요일과 같이

늦잠에서 깬 뒤 머리핀을 찾아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알게 되었지

살면서 머리핀 하나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가

기다렸다는 듯 머리칼은 흩어지고 조금의 아픈 기색도 없이

아 따분해 다시금 잠들고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잃어버렸다, 는 말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잃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

갖지 않고도 산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나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게 되었다

머리핀 아니라 해도

 

내게는 잃은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내가

아니라 해도

 

세상에는 내가 너무 많고

 

어느 일요일 아침

늑장을 부리며 눈을 뜬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질 것이다 수없는 내가 그래왔듯

 

나는 또 살게 될 것이다 (잃어버렸다전문)

 

어느 시절에는 소설의 한 문장에서 매우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문장을 읽고 외우며 그것에 기대어 살기도 했다. 어느 시절엔 이처럼 우연으로 다가온 한 권의 시집에서 이런 시를 발견하고 울컥한다. 잃어버린 물건을 떠올리다가 내가 잃어버린 사람의 흔적을 뒤적이다가 멍한 시간을 보낸다. 뒤늦게 그 물건을 발견하게 되면 얼마나 반가울까. 그러나 그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반갑지 않거나 외면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지나칠 수도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 또한 살게 될 것이다. 시를 읽으며 그런 보통의 일상을 견디며 단단해질 거라 믿는다.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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