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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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엔 처음이 있다. 누구나에게 존재하는 처음의 기억. 첫이라는 설렘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을 동반한 어떤 일들에 대한 기억. 선명한 장면으로 남거나 애써 지우려 했던 처음의 기억. 잘 알지 못해서 실수를 할 수 있는 마음과 그것들을 감추려 애쓰는 마음이 한자리에 모여든 날들. 처음이 있기에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고 잘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점검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우리가 통과한 처음은 어떤 모습으로 내게서 멀어졌는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사랑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을까.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은 그런 처음을 모은 소설집이다. 누군가에겐 아득했던 처음의 기억을 소환하고 누군가에겐 바로 지금의 나날과 닮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학교, 부모의 보호 혹은 감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고 연인을 만나고 직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경험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회 초년생이나 20~30대의 생활 기록 같은 글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소설 속 인물은 결국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가만한 나날』은 처음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직장에서 동료와의 경쟁, 연인과의 갈등, 부모 세대와의 불화를 보여준다. 정규직원이 아닌 인턴으로 시작된 사회생활은 얼마나 불안한가. 동료란 이름의 경쟁자를 향한 묘한 분노와 미움이 결국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이상한 공식. 마케팅 회사에 들어가 가짜 일상을 기록하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광고를 하는 업무를 맞은 ‘경진’ 이 느끼는 양가적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낸 「가만한 나날」, 정규직이 되면서 직장 근처로 이사를 했지만 이전과 다르게 직장생활이 버겁기만 한 ‘상미’의 일상을 들려주는 「감정 연습」, 첫 직장에서 사수 역할을 했던 상사가 ‘선화’에게 강압적이었던 자신의 태도를 사과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드림팀」을 통해 보통의 직장 생활의 민낯을 엿본다. 좀 더 친근하고 다정하게 업무를 알려주고 배울 수 있었던 처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직장에서의 처음이 이토록 힘들었다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삶을 시작하는 동거나 결혼의 처음은 평탄할까. 생활은 현실이므로 그들의 처음도 삐꺽거린다. 어떤 불행을 암시하는 제목처럼 보이는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속 연상 연하 커플인 ‘진아’와 ‘연승’은 직장을 관두고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연승의 선배의 집을 방문한다. 그들의 일상이 진아와 연승의 미래처럼 보이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현기증」속 동거를 하는 ‘원희’와‘상률’에선 원희가 은행을 그만두고 반영구 화장을 배운다. 둘은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원희는 자신들을 신혼부부로 대하는 시선이 불편하고 가구나 가전제품을 중고로 구매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원희가 상상했던 결혼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현실적인 결혼생활을 보여주는「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속 ‘루미’와 ‘나’는 우선 대출을 받기 위해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은 미룬 상태다. 알코올 중독으로 혼자 아버지가 계신 물나들이에 다녀오면서 나는 ‘부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고 서로를 원망하듯 자신도 루미를 원망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빠진다.

 

보통의 일상을 차분하게, 때로는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기록한 소설이다. 감당할 수 없어 어지러움을 느끼는 순간의 경험을 주고받으며 지냈던 우리의 처음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나도 그때 그랬는데, 하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지게 만든다. 나의 일부가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누군가를 상대하고 성장하는 듯하다.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현기증」, 80쪽)

 

모든 처음은 불안정하다. 그래서 선배나 부모는 걱정 어린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조언을 늘어놓는다. 서툴고 불안한 처음을 경험하고 통과한 후에야 그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의 처음에 조언을 하는 자신을 보고 놀란다. 완벽한 처음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소수의 처음을 제외하곤 말이다. 어쩌면 우리 생은 미완으로 시작된 처음이 완성이라는 끝을 행해 나가는 건 아닐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디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되돌아가기도 하면서 그러다 새로운 처음을 만나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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