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늙다’랑 ‘추하다’를 같은 뜻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다. 늙는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살았던 시절에 말이다. 노년의 삶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착각했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삶이라는 게 모두에게 똑같을 수 없듯 한 사람의 생은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것인지 조금씩 깨닫는다. 그러니 평생 집사란 직업에 최선을 다한 스티븐스가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해 회상하며 후회 없이 살았노라고 자신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영국 달링턴 홀의 집사로서 주인인 달링턴 경을 모시고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모임과 회의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자부심도 그에겐 지나치지 않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충직한 영국인 집사 스티븐스가 달링턴 홀의 주인이 미국인으로 바뀌면서 평생 처음으로 휴가륻 받아 서부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일주일의 이야기다. 스티븐슨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집사로의 책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 회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스티븐스의 여행길에서 그가 보고 느끼는 것들과 함께 지난 시간의 삶을 교차로 들려준다. 그러니까 과거의 화려했던 달링턴 홀과 망해가는 그곳을 현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 스티븐스의 젊은 날을 말이다. 여행의 다른 목적은 과거 달링턴 홀에서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만나 다시 달링턴 홀에서 일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달링턴 홀을 떠나 그녀가 보낸 편지를 곱씹으며 스티븐슨은 과거의 달링턴 홀에서 자신의 일상을 돌아본다. 가장 완벽한 집사, 품위를 지키며 최선을 다했던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이 많은 이들이 주목받고 사랑했던 이유는 아마도 영국인 집사 스티븐스의 생이 세계대전이 일어난 1920년~1930년대 유럽의 격동기와 맞물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역사가 나라의 역사가 되고 세계의 역사가 된다는 건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특정 인사의 선택과 결정으로 이뤄진다. 그러니 결정적인 힘이 모여든 달링턴 홀에서 집사였던 스티븐스의 삶은 보통의 그것과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 스티븐스의 삶은 어떤가? 대를 이어 집사의 길을 선택하면서 내 삶은 존재하지 않았고 모시는 이의 분신으로 살았던 건 아닐까.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대신 국제 회합에 더 집중하는 걸 택한 스티븐슨. 그것이 자신의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던 그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스티븐스의 차과 옷차림을 보고 그가 집사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선생님이라 부르며 뭔가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다. 스티븐스도 그런 반응에 반박하지 않고 한 편으로는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여전히 집사로의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달링턴 홀의 새로운 주인인 미국인 주인을 열심히 모셔야 한다는 각오와 함께 말이다. 그때 당시의 선택에 후회가 남은 것 아니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건 켄턴 양의 행동과 말들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녀를 해고하라는 달링턴 경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듯이 따르고 켄턴 양에게 통보하는 스티븐스에게 켄턴 양은 몹시 실망한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는 위치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티븐스를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스티븐스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업무에 관해 까칠하게 굴며 업무 외의 시간에도 자신의 공간에 화병을 들고 찾아오는 켄턴 양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집사로의 일과 무관하다고 여겼기에. 아니, 만약 과거에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해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후회하면서도. 여행의 끝에 켄턴 양을 만나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인생의 황혼 길에서 만난 누군가는 저녁을 즐기라 말한다.

 

 “우리의 관심은 주로 행복했던 기억들에 모아졌으며, 휴게실에서 함께한 그 두 시간이 나는 지극히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다양한 손님들이 들어오고 잠시 나가고 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결코 우리의 주의를 흩어 놓지는 못했다.” (289쪽)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을 하루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벋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300쪽)

 

 누구든 지난 삶에 후회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후회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선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내가 왜 그때 그랬을까, 가까운 이들에게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시대적 상황과 집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든든한 방패 삼아 적절하게 회피한다. 앞으로 남아 있는 날들에 대해서도 집사가 아닌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선택이니 켄턴 양과 여행에서 만난 이들의 조언도 어쩔 도리가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날들,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가 허무감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고집불통이라 말해도 스티븐스가 그의 삶의 주인인 것을. 묵묵하게 지켜온 자신만의 삶의 기준과 가치를 그가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을.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30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