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자극적인 맛, 자극적인 뉴스, 자극에 자극을 더하는 세상이 되었다. 심심하거나 순수한 것은 실패했다고 단정 짓는 이상한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그럴까. 우리 삶에 필요한 맛은 맵고 짠맛뿐일까. 이러다 재료 자체의 본연의 맛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두렵다. 오가와 이토의 『마리카의 장갑』은 우리에게 그런 맛을 선물한다. 자연 그대로를 지키며 살아가는 루프마이제공화국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중한 것을 간직하고 그것들과 함께 어울려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작고 예쁜 마을의 사람들. 그곳에서 태어난 작은 여자아이 마리카의 인생을 들려준다.

 

 루프마이제공화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엄지 장갑(벙어리장갑)을 선물 받는다.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떠준 장갑, 마리카도 그 엄지 장갑을 떠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모든 루프마이제공화국의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과 오빠들의 사랑을 받고 자유롭게 성장한 마리카에게도 그런 순간이 왔다. 배우고 통과해야 할 과제가 아닌 진짜 사랑하는 이를 위한 엄지 장갑, 마음을 전하는 고백의 장갑의 주인을 만난 것이다. 야니스, 그에게 마리카의 직접 뜬 엄지 장갑을 건넸고 그는 엄지 장갑을 손에 꼈다. 마리카의 청혼을 야니스가 수락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한 일생을 살아가는 일만 남았다 믿은 마리카.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변수투성이다.

 

 얼음제국이 루프마이제공화국을 병합하고 그들의 삶을 제약했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의 춤과 노래가 사라지고 민족의상도 입을 수 없다. 엄지 장갑 전통만 허락되었다. 힘들고 고된 생활이었지만 야니스와 마리카의 사랑은 점점 깊고 단단해졌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야니스에게 연행 명령이 떨어지고 둘을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 혼자 남은 마리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마리카는 슬픔 대신 다짐을 선택하고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웃는 일상을 유지한다. 마리카에게 주어진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길고 추운 겨울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비 갠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습니다. 지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그네도 반짝입니다. 아름다운 꽃밭이 보이고, 그 너머로 숲이 펼쳐져 있습니다. 마리카는 자신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변화했을 뿐입니다. 야니스도 그렇습니다.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바람과 빛과 비와 무지개와 흙과 나무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193쪽) 

 

 누군가는 마리카의 인생이 불행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야니스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마리카는 홀로 할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마리카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루프마이제공화국은 유럽 북동부 발트해의 동해안에 있는 나라 라트비아의 다른 이름이다. 작가 오가와 이토가 반한 나라의 문화와 전통, 관습이 이 소설에 녹아 있다. 라트비아를 검색하면서 겨울 왕국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얼음처럼 차갑고 추운 나라에서 따뜻한 온기를 전해줄 엄지 장갑의 의미는 감사함과 사랑은 아닐까. 한 편의 동화 같은 소설이다. 아니, 아름답고 소중한 누군가의 인생이다. 

 

 오기와 이토의 『마리카의 장갑』는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책을 덮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손뜨개를 하고 싶게 만들었다. 손재주라고는 1도 없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처음 만난 오기와 이토의 소설은 엄마의 집밥 같은 맛이었다.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맛, 자꾸만 생각나는 은근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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