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문지 스펙트럼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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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건, 이제 힘껏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버림받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75쪽)

 

 생을 지배하는 건 무엇일까. 의지일까, 환경일까. 한때 유명했던 광고 카피처럼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답할 수 있는 의지를 생각한다. 함께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사냥을 하고 눈 지치기를 하며 천진난만하게 서로를 바라보던 애틋했던 시선을 뒤로하고 혼자서만 그들을 떠나 추방당하는 ‘나’의 환영이 지워지지 않는다. 혼자가 아니라서 외부 마을과 단절된 채 갇혀 있었지만 무서움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믿었는데 막상 떠났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자 믿음은 와르르 무너지고 소년들은 다시 아이가 돼버렸다. 오에 겐자부로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이야기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를 외면하고 소년들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였으니.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그런 10대의 소년들이었다. 춥고 배고픈 그들이 주먹밥과 뜨거운 국을 거부하고 죽음이라는 공포를 상대할 수 힘이 없었으니까.

 

 그럼 아이들은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일까. 소설의 시작은 이랬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세상은 여전히 살인의 시대였다. 이제 겨우 어린아이 티를 벗은 십 대의 소년들, 많아야 열일곱이나 열여덟이 될 법한 아이들이 가족의 품을 떠난 감화원 생들은 어디론가 이동한다. 대부분 별것 아닌 호기심으로 저지른 잘못이 전부였다. 일행에서 탈출한 아이들이 돌아오고 교관의 지도하에 걷는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소설의 표현처럼 그들은 지루한 ‘여행’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여행의 끝에 마주한 건 산골의 외진 마을이었다. 교관으로부터 아이들을 인계받은 촌장은 바로 노동을 지시한다. 온갖 동물의 사체를 땅에 묻는 일이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동물의 사체. 불안한 기운이 아이들을 둘러싼다. 소년들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거리를 두며 경계한다. 눈치가 빠른 소년들은 마을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살겠다고 도망친다.

 마음엔 소년들만 남았다. 어른들의 행태에 분노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롭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날 수 없게 건너편에서 소년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총까지 들고 말이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떠난 마을을 뒤지고 먹을거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다 흙광에서 죽은 엄마를 곁에 두고 버려진 여자애를 발견한다. 동물의 시체를 파묻었던 것처럼 여자애의 엄마를 묻고 끼니 때마다 챙긴다. 어른들이 없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보호한다. 때로 의견이 맞지 않아 생기는 충돌은 곧 사라진다. 뭐랄까, 끈끈한 연대라고 할까. 스스럼없이 막역한 사이, 형제 아닌 형제가 되고 동료가 된다. 조선인 소년 리, 도망친 군인, 모두 약자였다. 이곳에 갇혀있다는 사실과 전염병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나 십 대 소년의 모습을 회복한다. 머리를 맞대고 사냥을 궁리하고 눈이 내린 아침에는 한바탕 눈싸움을 하고 눈 지치기를 한다. 사냥한 꿩을 요리하고 그들만의 축제를 즐긴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냥 이렇게 아이들이 신나게 지내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으니.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감화원을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결말을 기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두고두고 과장된 무용담을 들려주기를 바랐다. 

 

 소설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약자를 지켜줘야 하는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폭언으로 위협하고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협박했다. 어떤 이는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책임을 피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런 비겁하고 비열한 어른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만은 아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소설을 발표한 1958년은 60년이 지난 현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 더욱 답답하다. 진실이 아닌 거짓을 회유하는 촌장에게 맞서는 당당한 ‘나’의 모습은 정의의 열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소년 ‘나’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멈추지 말고 그대로 달려나가기를. 십 대의 시절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며 열광했던 소년을 간직한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엉뚱한 바람.

 

 거기에 완전히 새로운, 청정한 새벽이 있었다. 눈이 내려 쌓여 땅을 뒤덮고 나무들은 둥그스럼한 짐승의 어깨처럼 봉긋 부풀어, 무한한 밝음으로 햇빛에 반짝거렸다. 눈! 나는 뜨거운 탄식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눈,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이토록 풍성하고 호사스러운 눈을 본 적이 없다. 작은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 그리고 힘이 넘치는 것처럼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추위에 입술을 깨물고 촉촉이 젖은 눈으로 문밖의 눈을 보았다. 나는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143쪽)

 

 이처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묘사는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전쟁과 전염병이라는 우울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고 할까. 그것은 마치 환경을 넘어선 소년의 의지를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 철학적이고 사회 비판적이라 어려워하는 독자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줄 소설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니 오에 겐자부로 소설의 입문서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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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9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30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11-30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나온 오에 겐자부로의 책이네요. 1958년에 출간된 작품이면 초기에 가까운 시기에 쓰여진 책이라고 보아도 될까요.
일본은 1960년대만 해도 경제적인 발전은 되었지만, 그래도 종전 후 10여년 정도 되는 시기라서 이 시기의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 같은 것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이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좋은 리뷰 읽고 책 소개도 한 번 더 보고 갑니다.

자목련님 오늘은 11월 마지막 날입니다. 11월에는 좋은 일들 많이 있으셨나요.
11월의 남은 행운은 오늘 안에 꼭 쓰시고,
내일부터는 더 좋은 일들 많이 찾아오는 12월의 첫날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18-12-03 11:25   좋아요 1 | URL
네, 문지에서 이전에 출간했던 책인데 이번에 문지 스펙트럼으로 개정판이 나왔어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어요. 서니데이 님, 12월 건강하고 맑게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