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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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머무는 일상, 시가 흐르는 일상은 언제나 멀리 있다. 좋아한다는 고백만 허공에 퍼질 뿐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나희덕 시인의 시집을 마주하니 친구의 목소리가 함께 떠오른다. 그녀는 어느 시절에 시를 공부했고 언젠가 내가 선물한 나희덕 시집에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라는 답을 건네주었다. 겨울비가 그친 조금은 쓸쓸한 날들, 삶의 비탄이 가득한 나희덕의 시를 읽는다. 고통으로 채워진 시간과 죽음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삶은 아닐까. 시로 기록된 약하면서도 강한 우리네 생을 읽는 일은 깊은 숨을 여러 번 내뱉게 만들었다. 지워지지 않는 기록, 사라지지 않는 모습, 기억해야 하는 장면, 고통스럽지만 지속하고 싶은 순간.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일상들이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

 책상 밑에 의자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 탕, 두드리는 손들,

 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들여 있는가  - 「난파된 교실」​일부

 그래도 문은 열어두어야 한다

 입은 열어두어야 한다

 아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바다 저 깊은 곳의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말의 문턱을 넘을 때까지  -「문턱 저편의 말」​일부

 그날의 바다를 나는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었다. 거짓 뉴스를 믿었고 기뻐하며 안도했다. 그러나 곧 진실에 절망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커졌고 어디론가 떠나는 아이들을 붙잡고 싶어졌다. 시는 보여준다. 그 이후 성장하지 못한 채 흐르는 시간을,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날들을. 보호받지 못한 삶, 허울뿐인 제도를 생각한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밥을 먹는 동안에도 또다른 지진이 있었는지

 부서진 흙이 밥 위에 떨어져내렸는지

 그릇들은 다시 쟁강거리고

 책장에서 남은 책들이 쏟아져내렸는지

 벽시계가 곤두박질치며 시곗바늘이 멈추어버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흔들리는 나날 밖에서 희미한 파동을 느낄 뿐 - 「우리는 흙 묻는 밥을 먹었다」​일부

 

 언젠가 들은 폐허 문학을 생각한다. 삶이 파괴된 공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사라진 일들, 그것을 기록하는 일, 읽는 이를 그곳으로 모이게 하는 힘. 문학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시와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리고 주의를 살피는 힘을 키운다. 그러니 이 시집은 개개인의 슬픔을 넘어 참담한 사회적 고통을 위로함과 동시에 아름답고 숭고한 저항의 기록이다.

 

 나는 나희덕의 고요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기대했다. 이전에 내가 좋아했던 건 사라질 듯 붙잡을 수 없는 감정을 포착한 것들이었다. 가만히 다가와 기댈 수 있는 등을 내미는 연인처럼 다정하고 든든한 그런 느낌. 하지만 『파일명 서정시』​에는 투쟁, 자유, 연대를 향한 몸짓이 전해졌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시라는 표석에 새긴다. 세상을 향하여 능동적인 몸짓으로 삶을 노래하며 함께 부르자 손을 내민다.

 빛의 옥상에서

 서른세개의 날개를 돌려라

 

오다 가다 내리다 흐르다 멈추다 녹다 얼다 타오

르다 꺼지다 보다 듣다 생각하다 말하다 삼키다 뱉다 잡다

놓다 울다 웃다 주다 받다 묻다 답하다 밀다 당기다 열다

닫다 떠오르다 가라앉다 부르다 사라지다 넘다

 

 서른세개의 동사를 사이에서

 하나의 파도가 밀려가도 또 하나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니

 세상은 우리의 손끝에서 ​​부서지고 다시 태어날 것이니

 

 기다리지 말고 서른세개의 노를 저어 찾아라

 세계의 손끝에서 마악 태어난 당신을   - 『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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