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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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결같은 순간이 있다. 꿈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꿈속처럼 아득한 순간 말이다. 비현실적으로 너무 좋아서 꿈인가 싶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제발 꿈이었으면 하는 그런 순간. 배수아의 단편집『뱀과 물』을 읽으면서도 누군가의 꿈속을 보는 듯했다. 그러면서 이 꿈은 악몽은 아닐까. 악몽이라면 소설 속 인물을 꿈밖으로 데리고 나와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 배수아를 읽는 일은 흐릿한 이미지를 오래 바라보는 일, 불편한 공간에 둘러싸인 낯선 시선과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설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왔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반두를 다녀온 것 같고, 길을 걷다가 눈 아이를 만나면 알아볼 것만 같다. 누군가는 배수아의 소설에서 어린 시절 한 번쯤 읽어보았을 잔혹동화나 마법의 세계를 보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맞는 말이다. 돌봄을 받지 못한 소녀, 폭력과 폭언인지도 모르고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을 소녀, 어머니나 아버지의 부재로 이어진 상실의 결속 같은 것. 그래서 단편의 소녀는 누군가를 찾아 떠나기도 하고 그 길에서 자신과 닮은 이를 만난 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곳, 그들만이 알 수 있는 곳이 된다.

 

 그 공간을 만들고 끌어당긴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배수아만의 감각이며 경험일지도 모른다. 공포나 두려움의 기억을 조작하여  환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소녀는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배치하고 주무르는 건 아닐까. 이제 그 이야기 속 소녀를 만나보자. 키가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던 소녀와 키가 커서 눈에 띄는 소녀, 아버지를 찾아 반두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탄 소녀, 소년으로 위장해 위험한 기찻길에 누워 엄마를 기다렸던 소녀. 한 번도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어린 시절. 온통 불온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하다. 소녀는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아니, 성장통을 앓지 않고 어른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소녀 앞에 나타난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실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들, 그러니까 열 개의 손가락에 금빛 반지를 끼고 있었지만 얼굴은 알 수 없고 마술사 아버지와 거인이면서 사령관인 아버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 유년의 기억은 왜곡된다. 그래야만 아이들은 견딜 수 있기에. 「얼이에 대하여」속 여동생을 낳고 아팠던 어머니를 기다리던 ‘나’는 소년이자 소녀였던 얼이의 다른 이름이었고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와「노인 울라에서」에서 아버지를 찾는 ‘눈 아이’는 동일 인물처럼 보인다.보호자 없이 아이는 어디론가 계속 이동한다. 이미 거론한 단편 속 소녀뿐 아니라「뱀과 물」속 소녀는 혼자 서류를 들고 직접 전학할 학교에 찾아오고 심지어 「도둑 자매」에서는 유괴를 당한다. 유방암을 앓아 더럽고 이상한 냄새로 가득한 방에 누워있는 여자를 엄마라 부르며 아이에게 언니라며 말하는 이상한 소녀에게서 도망을 치려고 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소녀는 너무 어려 공포를 모르거나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 순진하게 믿고 있는 듯 그려진다. 

 

 소녀 곁을 맴도는 어른은 누구인가. 단편마다 거론되지만 등장하지 않는 마술사이거나 사령관인 아버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 대신 「1979」의 남자 교사와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속 할머니는 보호자일까. 남자 교사는 자신의 반 아이들을 과수원 집에 초대하지만 소녀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집안 사정도 제대로 모르며 할머니는 커다란 트렁크에 짐을 챙겨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남교사는 허울뿐인 어른이었지만 할머니는 손녀의 이상이었다. 어쩌면 교사가 매일 통화하는 아픈 동생만이 소녀를 아는 유일한 어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소설집은 그가 정의한 어린 시절로 압축된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쪽)


 꿈을 꾼다. 그것이 악몽인지 길몽인지 분간할 수 없다. 아득한 풍경이 펼쳐진다. 계속 걷는 소녀는 어른이 되었지만 방향을 잃었고 목적지를 찾지 못한다. 승려를 만나기도 하고 뱀과 물이 나타나 위협하기도 한다. 비슷한 처지의 여행자를 알아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편지를 받고 상실의 결속으로 쓰인 시를 낭독한다. 꿈에서 깨어야 할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들에게 어떻게 작별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 망상일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이에게 잘 지내라고, 잘 있으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소리를 내지 않는 대신 입모양으로 길게 말한다. 안녕이라고.

 

 어린 시절이라고 불리는 거무스름한 낡은 주물 거울에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도둑 자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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