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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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제법 단단해졌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고 말이다. 처음엔 혼자서 그 모든 걸 견디고 애를 쓴 거라 여겼지만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이들의 따뜻한 마음과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를 사랑한 이들의 기운이 내게로 흐르고 있었던 거다. 태초부터 시작된 알 수 없는 사랑까지 전부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사야카와 이치로가 운명처럼 다시 만나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사토루와 사별하고 딸 미치루와 함께 시부모님의 2층에 살고 있는 사야카에서 도착한 한 통의 편지.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마당에서 찾고 싶다는 내용의 발신자는 헤어진 연인 이치로였다. 과거에 이치로가 살았던 집에 자신이 살고 있다니. 마당의 흙을 파보니 조그만 뼈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야카는 이치로와 재회한다. 스무 살에서 만나 결혼까지 생각했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아이를 낳아달라는 말로 사토루의 청혼을 받아들인 사야카의 마음은 사랑이었을까.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로 부모를 잃고 사물과 접촉하면 이력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야카였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삶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판단하고 예측한다. 그들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사야카도 이치로는 과거를 이야기하며 서로에게 사과한다. 마음에 간직했던 미안함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불편했던 것들이 해결되고 사야카와 이치로는 현실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한다. 조금은 특별한 사야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은 느리게 천천히 생활하는 이치로를 인정한다. 조금씩 일상을 공유하고 좋은 친구로 지내는 두 사람, 환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시간이 지났기에 상처가 온전히 나은 건 아니다. 상처를 똑바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 힘은 자신의 곁을 지킨 이들에게서 비롯된다. 사고로 다친 손을 치료하는 동안 사야카를 돌본 발리의 고마운 이들, 병과 싸우고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미치루를 사랑한 사토루, 손녀와 며느리를 배려하고 지원해준 시부모님, 헤어진 후에도 사야카를 위해 기도했던 이치로의 어머니.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는 말처럼 우리의 생은 이렇게 서로에게 연결된 건 아닐까. 아무도 모르게 나와 닿아 있는 수많은 손길, 그 포근한 손길이 울고 있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웃고 있는 나를 안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렇게 이어져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있다 없어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갖가지 좋은 일들을 생각한다. 그 여운이 모두를 따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138쪽)

 

 요시모토 바나나는 사람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 대해 말한다. 한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섣불리 안다고 자신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둘 사이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다면 제법 잘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맑고 투명한 구슬 같은 소설이다. 가만히 두 손으로 감싸고 자꾸만 바라보게 만드는 영롱한 구슬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동화 속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처럼. 선하고 고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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