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무난하지만 읽다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만 새로 고쳐봄.

  #나머지 부분도 시간나면 보충예정.

 

 

 

세계화와 문화적 차이


118쪽.
타지에 근거를 둔 영어 숙련자라고 한다면, 국내의 복잡한 사정에 정통하지 못할 수 있어, 일반적으로 알려진 추상적인 개념에 의거해서 사고하고 표현할 수도 있다.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국내상황을 자신에게 익숙한 영어적 문맥으로 치환하여 감각하고 판단해 버릴 수도 있다. [문장추가] 그렇게 되면 국경을 넘나드는 교류가 불가피하게 ‘자유인’에게...

119쪽.
영어의 사용이 초래한 제약 때문에 문화충돌에서 가장 곤란한 부분이 교류의 과정에서 여과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모국어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분석한 것처럼, 다른 문화를 매개로 한 진정한 문화간 교류는 한 문화의 내부에서 발생한다. 모국어에서의 이탈이 초래한 한계는 모국어의 사용이 만들어낸 한계보다 작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영어 사용자가 국내의 복잡한 정황을 전달하는 이상적인 국면을 설정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국면은 아직 출현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고려 때문에 지식공동체 대화에서 반드시 참가자의 모국어로 진행하되 동시통역을 배치하기로 했다.

120쪽. “한국의 사상자원에 대해 안다고 할 수도 없지만,”...  →
반대로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한국 지식인의 참가로 인해 한국의 사상 자원에 대한 우리의 안목이 넓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서양’이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121쪽.
근대 이래로 동양의 여러 지역과 서양 간에 일어난 문화적인 상호 침투와 그로 인해 동양에 대한 문화적 헤게모니를 서양이 장악하게 되었다는 기본상황을 직시하여, 역사의 표현수단과 현실상황의 분석방법을 사유하는 것을 우리의 과제로 설정할 수 있다. 이 때 우리가 이분법적인 모델을 폐기하고 문제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서구이론을 일종의 보편모델로 상정해 무매개적으로 무한히 적용하는 것을 피하고, 자국의 사상자원의 특수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서구적 근대성 서사를 거부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이 양자를 연구와 사유에 있어 반드시 동시에 고려하여 논의의 시각과 한계를 형성

이 문제의 지적 위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토론하기도 전에, 지식을 추구하는 객관적 자세로 논의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다. 상술한 것처럼 대다수 일본학자들은 지식의 입장을 고수하고 지식인의 입장은 거절했지만,[문장추가]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지식인의 입장에 서서 지식을 통합하고 주도하고자 했다. .. 2차 회의에서 이 문제가 전면에 부각돼 더욱 많은 문제점을 도출하였다.[문장추가]

122쪽 마지막 단락~123쪽.
처음 두 번의 모임은 서구의 이론적 자원이 “이론의 방식”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지식계에 보급된 후 생겨난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 이론은 추상적인 결론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며, 그 이론이 구체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지점이 명확하다. 따라서 서구 이론을 읽어내는 작업은 서양사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연역에 기대서만은 안 된다. 서구 이론을 동양의 맥락에서 추상화하거나 심지어 미리 만들어진 방법론이라 여겨 기계적으로 적용할 때 이론의 생명력은 말살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32쪽.
정당한 자기 입장을 확보할 수 없음이 모든 컨텍스트에서 발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면, 보편성과 특수성의 공모관계를 비판하는 작업은 한층 복잡해지고 역사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자기 입장의 정당성이 어떠한 컨텍스트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할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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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쑨꺼(孫歌),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창비)에 번역된 “아시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59-106쪽)는 완전한 全文번역이 아니다. 원문은 전체적으로 3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번역은 2절 후반부 정도까지만 되었다.  <주체가 확산되는 공간(主体弥散的空间)>(江西敎育出版社, 2002), 97-163쪽(누락된 번역은 130쪽 마지막 단락에서 시작)을 텍스트로 추가로 번역한다.
# 1, 2절 내용 중에서는 일부 오역이라 생각되는 부분만 고친다.

  

1. 두 갈래의 사유: 아시아는 존재하는가?

71쪽: 이것은 지역적 실체성의 문제로서 어떠한 기호화의 여지도 없었다.
→ 이것은 순수한(道地的) 실체성의 문제로 어떠한 기호화의 여지도 없었다.

("기호화", "부호화"로 섞여서 번역되고 있는데 모두 "기호화"로 읽으면 된다)

73쪽: 만일 동양이 반드시 서양에 대한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려 한다면, 서양은 동양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지식을 버려야만 하지 않을까?
→ 만약 동양이 서양에 대한 무지를 타파해야 한다면, 서양은 동양에 대한 선입관(旣知)을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75쪽: 그리고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대립구도를 잠시 밀쳐두고 더 높은 안목에서 그들 사이의 일치성을 드러내면서 그들과는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사유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아시아담론이 공통으로 구비하고 있는 강렬한 이념적 성격과 더불어, 아시아와 서양을 이분법으로 분리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의식적으로 소홀히하면 살피지 않은 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대립구도를 잠시 밀쳐두고 더 높은 층위에서 그들 사이의 일치성을 발견하고, 그들과는 대립되는 또 다른 사유의 단서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아시아담론이 공통적으로 강력한 이념적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아시아와 서양이라는 구분 방식이 누락시킨 지점을 의도적으로 계산에 넣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두 갈래 사유의 접점

100쪽: 타께우찌가 아시아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반면 우메사오는 아시아의 의의를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 이러한 구분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104쪽: → 즉 문명사관의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사물의 전후관계만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시적 관계를 자기 사고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어느 한 시대에는 각양각색의 문화적 요소 및 여러 제도와 수단 그 모두가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바로 그들이 전체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때문에 역사란 이러한 동시적 체계의 시간성이 변천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비, 106쪽 이후)
와쯔지 테쯔로오와 우메사오 타다오를 동일선상에 놓고 취급하는 것은 상당히 거친 생각이다. 그들의 사상적 입장과 학술 방식이 보여주는 너무나 분명한 차이는 우리가 이렇게(아시아를 사유하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병치하는 것을 방해한다. 게다가 우메사오 타다오가 와쯔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시도는 기본적인 지식상황에 대한 사고(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학과 범위 내부에서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너무 길들어져 동일한 문제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소홀히 한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선행연구자의 한계를 너무 쉽게 비판하지만 그것을 낳게 한 심층의 역사적 원인에 대해서는 소홀하며, 따라서 그것이 감추고 있는 성장가능성의 계기를 무시하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진행한다고 착각하곤 한다. 사실 와쯔지 테쯔로오의 <풍토>가 만약 그의 윤리학 영역 안에서만 인식되고 말았다면 이후 일본사상의 전승에서 그것이 가지는 위치는 불명확할 것이다. 사카이 나오키의 비판을 빌려오면 와쯔지 테쯔로우의 풍토론과 우메사오 타다오의 생태사관의 차이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와쯔지는 주체성에 대한 해소를 서양 근대 계보학의 문화본질주의를 기초로 하여 세웠고, 우메사오는 반대로 기능론을 근거로 이러한 문화본질주의를 제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문제를 이런 층위에서만 추구한다면 우리는 더욱 복잡한 사실을 대면할 수가 없다. 아시아주의라는 상이한 영역의 상이한 입장을 지닌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대면한 문제에서 우리가 보아내야 하는 것은 절대로 보편성과 특수성의 공모관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이런 공모관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동양적 형태 자체로는 아시아주의를 인식하는 전체적인 시각을 구성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각의 제거 외에, 근대 이래 일본인의 완강한 아시아주의 건설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풍부한 함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와쯔지 테쯔로우의 풍토적 시각이 사실상 더욱 거시적인 시야에서 그 위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념으로서의 아시아주의와는 서로 대립되는 또 다른 시각으로 작용하며, 아시아 인식의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한다. 우메사오 타다오의 문명학을 경유하면서 나는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아시아가 하나의 지역이지 어떤 이념이 아니라는 점이며, 그것이 다시금 질문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와쯔지에게서 이러한 질문은 자각적이지 않고 분명하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아시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아시아의 결석)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메사오에게서 질문은 자각적이고 분명하며, 아시아의 이념성과 문화본질주의를 해체의 대상으로 삼았다. 보다 철저하게 말하자면 풍토에 대한 관심은 분명 와쯔지의 공헌이다. <풍토> 자체가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지고 있던 간에, 그것이 어쨌든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여 아시아주의 논의가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이념성에서 벗어나 또 다른 사유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50년대 말 사상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우메사오의 문명학이 90년대 후반에 오히려 새로운 탈아론 사조와 합류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각각의 학설이 지닌 이데올로기 기능에 주의하는 동시에 이데올로기 분석에만 매몰되지 않는다면, 그럴 경우 사상 영역에서 드러나는 다원적인 복잡한 양상이 아마도 역사적 진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3. <아시아에서의 사유>의 위치와 그것이 보여주는 문제

와쯔지 테쯔로오의 윤리학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아시아를 문제화하는 또 다른 사유가 잠재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상의 내재적 장력을 갖추지 못하였고 학리적인 성격에 치중하고 있어 상술한 아시아 문제의 논의자들과 같은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사유가 함축하고 있던 가능성은 반세기가 지난 후 점점 부상하고 있다.
  그것은 교토학파의 역사학자들이 진행한 아시아에 대한 사유이다. 필자가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 설립한 사학전통에 대해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한 것은 아닌지라 어떤 총체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두 명의 역사학자의 아시아에 관련된 사유에 대해 초보적인 논의를 시도하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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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배제된 동아시아 세계사로 탑승해야” 동북아 민족주의의 이상기류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한 일본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 전 도쿄대 총장을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가 25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이사장직도 맡고 있는 문화평론가 도 교수와 하스미 전 총장은 최근의 한·중·일 3국이 역사와 영토문제 등으로 마찰을 빚고 있는 현실을 염두에 둔 ‘동아시아 민족주의 이상기류’라는 화두를 놓고 대담을 했다.

도정일=이상기류라면 한-일-중 간 분위기가 오해 때문이든 민족감정 표출이든 심상찮다는 얘긴데, 우선 이상기류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하스미=3가지 정도를 얘기하고 싶다. 첫째, 프랑스 문학연구자로서 예전부터 생각해온 ‘75% 법칙’이라는 게 있다. 지금 이 지역에서 그게 구체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어느 국가 정책이든 정치, 또는 정치가나 정권이든 75%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민주주의에는 위험신호라는 얘기다.

예컨대 9·11 동시테러 때 조지 부시 미 대통령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미국민들이 더 이상 생각하기를 중단한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첫 선출 때도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75% 얘기가 처음 나온 건 1848년 프랑스 제2공화국 대선 때였다. 당시 루이 나폴레옹이 지지율 74.2%로 대통령에 선출됐는데, 3년 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다. 그때 지지율이 78%였다.

이런 일이 20세기에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이즈미 총리가 압도적 지지율로 총리가 됐을 때 민주주의에 위험 신호가 온 걸 눈치 채지 못한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도정일 고이즈미 총리 곧 일본은 정상인가? 하스미 독도·신사참배 과거 숨기려는 딴청 도정일=일본 얘기를 먼저 해주니 고맙다. 동북아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된다고 할 때 지식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생각하게 되는데, 먼저 자기 자신들부터 정상인지를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이즈미 총리 얘기는 곧 일본이 정상인가 묻는 얘기로도 들린다.

하스미=아까 얘기한 3가지 얘기 가운데 두 번째는 잘못된 문제 제기인데, 자기 내부의 국정이나 정권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잘못된 문제를 꺼내놓는 것이다.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독도 영유권 문제가 터져 나온 건 본질과는 무관한 잘못된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뭔가를 감추기 위해서 그런 건데, 그게 무엇인가? 20세기에 일본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에 많은 고통을 안겨줬는데, 그건 한-일 또는 중-일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도, 당한 아시아인들도 그 사실을 잊고 있다. 그게 문제다.

도정일=궁금한 건 그 인류에 대한 범죄, 폭력행위로 얼룩진 과거로부터 일본이 단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독일의 예를 드는데 나치의 범죄행위와 단절한 것을 한국 사람들은 매우 중시한다. 일본도 한번은 과거사와 제대로 단절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윤리·도덕적인 문제를 계속 껴안고 가야할 텐데.

하스미=독일의 예는 일본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독일식 청산도 올바른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최근 중국의 경우도 일본에 대해 일부 군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건 틀렸다.

일부가 침략한 게 아니다. 75%의 국민이 동조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일부만 탓하는 건 옳지 못하다. 독일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나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다.

진정한 청산이 되지 않아 네오 나치세력이 다시 등장한 것 아닌가. 인류에 대한 범죄는 비난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인 문제가 뭔지, 장차 어떻게 할 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게 지식인의 의무다.

도정일=지금 한·중·일은 다른 지역사람들이 봤을 때 민족주의의 과잉상태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스미=지금 일본은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있기는 하되 철저한 건 아니다.

일부의 외부 질책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인데, 작은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75%를 넘던 고이즈미 지지율이 지금 42%로 떨어졌다. 처음의 흥분상태가 식은 것이다. 결정적인 민주주의의 위기는 없을 것이다. 대신 작은 위기들은 있을 것이다.

도정일=한국에서도 민족주의에 관한 얘기들이 많다. 일본 민족주의는 국가가 강성했을 때 국가주의와 결합한 이데올로기로, 중국과 한국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고 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절 국가 부재상태에서 국가를 되찾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려는 민족주의였다. 중국의 경우도 가장 어려웠을 때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말하자면 저항 민족주의라는 건데, 헤게모니를 노린 민족주 퓻姑?구별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체로 그런 식의 구분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젊은이들 중에 작은 자긍심이랄까, 아까 말한 작은 민족주의랄까, ‘대한민국주의’ 같은 걸 표출하고 있다. 아주 다른 두 가지 경향이다.


도정일 독일처럼 과거 제대로 단절해야 하스미 일부만 탓하는 청산 찌꺼기 남아 하스미=매우 재미있는 지적이다. 토론이나 평가 없이 너무 지금에 집착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 시대나 사회 배경 등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 아까 얘기하다 만 세 가지 중 마지막 세 번째 얘기를 하자면, 동아시아 문제는 아직도 세계사에 등장하지 못한 채 도외시되고 있다는 것인데, 1998년에 베이징대학 설립 100주년을 맞아 그 기념행사에 초청돼 현지에 갔다. 그날이 5·4운동이 일어난 날이어서, 일본인으로서는 곤혹스럽지만 5·4운동이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저항운동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자리에는 캠브리지나 하버드 대학 등의 총장들을 비롯해서 초청받은 외부인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5·4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성균관대학 설립 600년 기념행사에도 초청돼, 유교 전통의 요람인 그 대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때 불탔고 일제 때는 총독부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유럽 대학들에서 온 몇몇 인사들이 나더러 왜 그런 사죄를 해야 하느냐는 투로 얘기했다. 유럽과 미국인들은 독일과 아우슈비츠에 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본과 한국이 공유해온 과거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일제가 한국을 얼마나 가혹하게 지배했는지에 대해서는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 문제 역시 인류 전체의 문제이지 한-일만의, 중-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바로 그런 게 아닌가 통감한다. 한-일, 중-일, 한-중 3국 간 문제로 왜소화하지 말고 세계사적인 문제로 공론화해야 한다.

도정일=동아시아 3국 간에 더 긴밀한 협력이 바람직하다. 경제협력은 아무리 3국 간 사이가 나빠져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오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뒤 이들 나라는 각기 다른 정치적 경험을 해왔다. 다투면서도 공통의 정치·문화 유산들을 지켜온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엔 공통의 유산이 없다.

동아시아가 세계를 향해 발신한다고 할 때 경제가 아니라 지적이고 도덕적인, 정신적인 가치에 치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하스미=<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이 한국과 일본은 다른 문명이라고 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돼 있는데 그냥 둬선 안 된다. 단지 영어로 씌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엉터리 내용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것은 지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정리/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하스미 시게히코는? 하스미 시게히코는 193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와 파리 4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으며, 도쿄대 교육학부 교수와 학부장을 거쳐 총장을 지냈다.

지금은 이 대학 명예교수다. 프랑스문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상징문화 및 영화 평론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링>을 감독한 나카타 히데오를 비롯해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등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들을 지도했다. 대표 저서로 <평범의 발명> <반일본어론> <영화의 기억장치> <필름 루나틱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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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24일 개막된 서울국제문학포럼은 이날 오후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홀에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이상'이라는 주제로 발표와 토론을 진행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복거일 씨는 '동아시아의 이상적 질서'라는 주제발표에서 "유럽 문명의 우월한 지식을 흡수하고 개선하는 일과 자신을 봉건적 국가에서 현대적 국가로 바꾸는 일에서 성공함으로써 일본은 이 지역의 다른 나라들의 현대화에 공헌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일본의 침략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며 무단 침략과 약탈적 군대, 모리배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그들의 죄에 대한 엄한 판결은 어떤 식으로도 도전받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복거일 씨는 "일본의 침략은 일본의 현대화의 한 측면이었고 일본의 현대화 자체도 두 문명 사이 지식의 불균형이 차츰 줄어드는 과정의 한 부분이었음을 가리킬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러한 역사적 견해는 동아시아 사람들을 그들의 국사 교과서들이 강요한 지적 속박에서 풀어줘 이 지역의 현대사에 관한 너른 합의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도쿄대 총장을 지낸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産) 씨는 '빨강의 유혹'이라는 주제발표에서 "'픽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갖는 다양한 불일치 때문에 이 단어에 주목한다"며 픽션에 대한 이론가들의 다양한 분석을 설명했다.

그는 주제발표문에서 "내게는 평화도 정신분열증적, 무정부주의적 개념"이라며 "종합도 분석도 평화의 정의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평화는 의미론적 갈등과 해석적 무질서로 가득 찬 개념"이라고 밝혔다.

주제발표가 끝난 뒤 이어진 토론에서 하스미 시게히코 씨는 "따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라며 "행사 시작 전 '보편성은 그 자체적으로 어떤 가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행스러운 우연의 결과'라는 글을 읽었는데, 매우 중요한 지적이었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거짓말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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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아시아의 근대화를 읽는 서브 텍스트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지음, 임성모 옮김 / 산처럼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혹시 "근대화연쇄점"을 기억하시는가?

내가 어렸을 때 "근대화"는 오늘날의 세계화 혹은 지역화처럼 유행어였던 모양이다. 구멍가게보다는 조금 크고 오늘날 우리가 마트 혹은 수퍼마킷이라는 호칭으로 익숙한 잡화점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의 가게들 중에 일종의 체인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근대화연쇄점이라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굳이 "근대화의 역군"이라든지 하는 우리 주변의 떠들석했던 여러 구호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근대화""반공"과 함께 최고의 이데올로기였다. 근대화가 의도하고자 했던 숨겨진 정서는 아마도 "못 살겠다 갈아보자""갈아봤자 더 못산다"던 이승만 정권 시절의 지긋지긋한 가난, 우리 민족 반만년을 억누른 배고픈 설움을 극복해보자는 것이었을 게다.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였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란 책에 대해 말하면서 왜 느닷없이 "근대화" 타령인가, 그것은 "만철", 아니 "만주국"이 우리 근대화의 실제 모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따라 "근대화(近代化, modernization)"는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쉽게 정의되기 어려운 말이면서 시대 상황과 그 말이 쓰이는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생각하는 근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근대화는 크게 두 가지을 의미한다. 그것은 '산업화와 민주화'이다. 막스 베버식의 관점을 차용했을 때 근대화란 봉건사회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아 혹은 다른 여타 후진 사회에 도입했을 때 근대화는 단순하게 보자면 서구화 혹은 서유럽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협소한 개념으로 보는 이들은 어느 한 사회가 다른 단계로 전이되어 가는 상황에서 응당 겪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근대화는 단순하게 서구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 근대화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이행해 하는 과정을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의 근대화는 어찌 보자면 서구화(경제적으로는 산업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의미한다)를 의미한다.

이 책의 저자인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 같은 발음이지만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와 착각하지 마시길 -  교수는 "대동아공영권, 쇼와 파시즘, 중일전쟁" 등 일제 침략사를 연구해온 일본의 중량급 역사학자다. 그의 연구 제목들이 알려주듯 그는 전쟁전 일본의 과거를 탐문하고 있다. 그의 저서 "만철"에서 종종 일본에 의해 피지배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묻어나는 것은 역시 그가 이런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탓이다. 스티븐 E. 앰브로스의 저서 "대륙횡단철도"는 미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에서 남북전쟁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을 대륙횡단철도 부설에 놓고 있다.

1865년 미국에서 시작된 센트럴 퍼시픽과 유니온 퍼시픽의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는 대사업은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대의 삶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바뀌게 되는 과정, 20세기 최대의 사건이랄 수 있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의 도화선이자 바탕이 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되는 초석을 놓아기 때문이다. 중국은 상해와 같은 동부 해안으로부터 옌안과 같은 내륙으로 100km 들어갈 때마다 시대적으로 10년씩 뒤로 밀려난다고 한다. 근대화가 동부 해안 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중국이 장강 삼협댐 건설과 같은 내륙의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우리는 얼마전 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3시간만에 주파한다는 고속철도는 그러나 서울에서 멈춰버렸다. 만약 이 열차가 평양을 거쳐, 신의주,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 바르샤바, 베를린에서 파리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반도국가라는 지리점 잇점을 십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비록 일제강점기였기는 하나 우리의 선조들이 열차를 타고 만주와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만주와 고구려사, 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도 이 책은 재미난 도입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주국과 박정희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만철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국의 대륙횡단철도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서부개척의 총본부였던 것처럼, 만철이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일제의 만주경영을 맡은 사실상 식민기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일종의 모델하우스처럼 만들고 싶었던 나라 만주국의 실질적인 브레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근대화 모델 박정희의 사상적 뿌리와 모델이 바로 그곳 만주에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의 신경(新京:現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8·15광복 이전까지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만철보다는 만주국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저자 자신이 만철을 이야기하며 만철을 통해 만주국 경영 문제가 전쟁 전과 전쟁 후를 잇는 주요 맥락으로 살피고 있는 이유이다. 만주국은 전후인 1950년대 일본이 이룩한 경제기적의 기본 정책을 실험했던 곳이고, 현재 남북한의 지배 엘리트들의 양대 뿌리를 이룬 박정희와 김일성이 청년기를 보낸 곳이다. 만주는 동북아 근/현대사의 블랙박스인 것이다. 박정희만 만주 출신인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최장기 국무총리를 지냈던 최규하 전 대통령 역시 만주국 관리 출신이란 점에 주목해 보자.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원형이 시작된 곳,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에 의한 재벌중심의 경제 성장 정책이 시작된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근대화의 두 얼굴 - 착취와 풍요

이 책을 읽노라면 종종 이 책의 저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간과하고 있는 몇 가지가 느껴져서 개운하지가 못하다. 그것은 고바야시 히데오가 만철의 낭만적인 면모에 몰입한 나머지 만철의 기본적인 속성과 숨겨진 의도를 적절하게 노출시키지 못하거나 가볍게 넘어가는 것들이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동인도회사를 건립한 뒤에 네덜란드를 식민지배했고, 영국인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뒤 인도를 식민지배했다. 만철은 일본이 만주를 식민지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일본은 민간회사를 가장해 제국주의적 침식의 한 수단으로서 만철을 이용한 것이다. 제국주의적 침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일본 정부는 만철이 주도한 식민 침탈을 단지 민간회사의 실수로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로 잡아 뗄 수 있었다.

앞서 우리 사회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고 말했다. 저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만철의 경제개발, 경제발전에 주목하면서 만주철도와 근대화가 지닌 다른 어두운 측면을 손쉽게 건너띈다. 오늘날 지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대자본의 유통업체들이 지역 사회의 작은 구멍가게들을 질식시키듯, 지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대자본의 서점들이 지역 사회의 영세 서점들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철도를 통해 이룩한 근대화(산업화)는 지역 혹은 한 국가, 민족의 자급자족적 경제 질서를 붕괴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팽창을 좀더 손쉽게 만들어 준다. 조선의 근대화가 단발을 강요했던 것처럼, 철도 부설을 위해 저임금과 비인간적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얼굴은 고스란히 박정희 정권 시절의 근대화 역군들의 얼굴과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우리는 경부고속도로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싼 값, 최단기간에 건설되었다는 근대화의 업적에 도취해 종종 그 뒤안길에서 살인적인 노동강도, 안전없이 강행된 공사로 인해 7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기존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를 '동북아시대위원회'로 개칭하고 그 구조와 기능을 크게 확대) 동북아시대위원회의 미래 비전은 종종 과거 만철과 일본이 추진하고자 했던 '대동아공영권'- 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았을 때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 다른 성질의 유사한 지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동북아네트워크 건설은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근대화의 두 가지 덕목 중 한 가지인 산업화는 분명하게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추진한 근대화의 후유증으로 인해 절름발이 근대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서구에서는 일찌감치 통과해왔고, 이제는 극복의 대상이 된 "민족국가" 건설이란 측면에서 아직 절름발이 상태에 놓여 있고, 식민지 지배 마인드 속에 추진되었던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산업화의 후유증 속에 놓여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민주화의 추진과정에서 끊임없이 박정희 모델이라는 이전의 망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싯점마다 되풀이 되는 과거 청산과 수구보수세력의 역공은 물론 그들 자체가 이땅의 견고한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문제도 있지만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세력, 민주화를 성취하겠다는  개혁세력이 박정희 모델로 표현되는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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