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쑨꺼(孫歌),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창비)에 번역된 “아시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59-106쪽)는 완전한 全文번역이 아니다. 원문은 전체적으로 3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번역은 2절 후반부 정도까지만 되었다.  <주체가 확산되는 공간(主体弥散的空间)>(江西敎育出版社, 2002), 97-163쪽(누락된 번역은 130쪽 마지막 단락에서 시작)을 텍스트로 추가로 번역한다.
# 1, 2절 내용 중에서는 일부 오역이라 생각되는 부분만 고친다.

  

1. 두 갈래의 사유: 아시아는 존재하는가?

71쪽: 이것은 지역적 실체성의 문제로서 어떠한 기호화의 여지도 없었다.
→ 이것은 순수한(道地的) 실체성의 문제로 어떠한 기호화의 여지도 없었다.

("기호화", "부호화"로 섞여서 번역되고 있는데 모두 "기호화"로 읽으면 된다)

73쪽: 만일 동양이 반드시 서양에 대한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려 한다면, 서양은 동양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지식을 버려야만 하지 않을까?
→ 만약 동양이 서양에 대한 무지를 타파해야 한다면, 서양은 동양에 대한 선입관(旣知)을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75쪽: 그리고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대립구도를 잠시 밀쳐두고 더 높은 안목에서 그들 사이의 일치성을 드러내면서 그들과는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사유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아시아담론이 공통으로 구비하고 있는 강렬한 이념적 성격과 더불어, 아시아와 서양을 이분법으로 분리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의식적으로 소홀히하면 살피지 않은 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대립구도를 잠시 밀쳐두고 더 높은 층위에서 그들 사이의 일치성을 발견하고, 그들과는 대립되는 또 다른 사유의 단서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아시아담론이 공통적으로 강력한 이념적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아시아와 서양이라는 구분 방식이 누락시킨 지점을 의도적으로 계산에 넣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두 갈래 사유의 접점

100쪽: 타께우찌가 아시아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반면 우메사오는 아시아의 의의를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 이러한 구분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104쪽: → 즉 문명사관의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사물의 전후관계만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시적 관계를 자기 사고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어느 한 시대에는 각양각색의 문화적 요소 및 여러 제도와 수단 그 모두가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바로 그들이 전체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때문에 역사란 이러한 동시적 체계의 시간성이 변천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비, 106쪽 이후)
와쯔지 테쯔로오와 우메사오 타다오를 동일선상에 놓고 취급하는 것은 상당히 거친 생각이다. 그들의 사상적 입장과 학술 방식이 보여주는 너무나 분명한 차이는 우리가 이렇게(아시아를 사유하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병치하는 것을 방해한다. 게다가 우메사오 타다오가 와쯔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시도는 기본적인 지식상황에 대한 사고(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학과 범위 내부에서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너무 길들어져 동일한 문제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소홀히 한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선행연구자의 한계를 너무 쉽게 비판하지만 그것을 낳게 한 심층의 역사적 원인에 대해서는 소홀하며, 따라서 그것이 감추고 있는 성장가능성의 계기를 무시하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진행한다고 착각하곤 한다. 사실 와쯔지 테쯔로오의 <풍토>가 만약 그의 윤리학 영역 안에서만 인식되고 말았다면 이후 일본사상의 전승에서 그것이 가지는 위치는 불명확할 것이다. 사카이 나오키의 비판을 빌려오면 와쯔지 테쯔로우의 풍토론과 우메사오 타다오의 생태사관의 차이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와쯔지는 주체성에 대한 해소를 서양 근대 계보학의 문화본질주의를 기초로 하여 세웠고, 우메사오는 반대로 기능론을 근거로 이러한 문화본질주의를 제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문제를 이런 층위에서만 추구한다면 우리는 더욱 복잡한 사실을 대면할 수가 없다. 아시아주의라는 상이한 영역의 상이한 입장을 지닌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대면한 문제에서 우리가 보아내야 하는 것은 절대로 보편성과 특수성의 공모관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이런 공모관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동양적 형태 자체로는 아시아주의를 인식하는 전체적인 시각을 구성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각의 제거 외에, 근대 이래 일본인의 완강한 아시아주의 건설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풍부한 함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와쯔지 테쯔로우의 풍토적 시각이 사실상 더욱 거시적인 시야에서 그 위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념으로서의 아시아주의와는 서로 대립되는 또 다른 시각으로 작용하며, 아시아 인식의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한다. 우메사오 타다오의 문명학을 경유하면서 나는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아시아가 하나의 지역이지 어떤 이념이 아니라는 점이며, 그것이 다시금 질문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와쯔지에게서 이러한 질문은 자각적이지 않고 분명하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아시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아시아의 결석)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메사오에게서 질문은 자각적이고 분명하며, 아시아의 이념성과 문화본질주의를 해체의 대상으로 삼았다. 보다 철저하게 말하자면 풍토에 대한 관심은 분명 와쯔지의 공헌이다. <풍토> 자체가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지고 있던 간에, 그것이 어쨌든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여 아시아주의 논의가 후꾸자와 유끼찌와 오까꾸라 텐신의 이념성에서 벗어나 또 다른 사유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50년대 말 사상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우메사오의 문명학이 90년대 후반에 오히려 새로운 탈아론 사조와 합류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각각의 학설이 지닌 이데올로기 기능에 주의하는 동시에 이데올로기 분석에만 매몰되지 않는다면, 그럴 경우 사상 영역에서 드러나는 다원적인 복잡한 양상이 아마도 역사적 진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3. <아시아에서의 사유>의 위치와 그것이 보여주는 문제

와쯔지 테쯔로오의 윤리학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아시아를 문제화하는 또 다른 사유가 잠재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상의 내재적 장력을 갖추지 못하였고 학리적인 성격에 치중하고 있어 상술한 아시아 문제의 논의자들과 같은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사유가 함축하고 있던 가능성은 반세기가 지난 후 점점 부상하고 있다.
  그것은 교토학파의 역사학자들이 진행한 아시아에 대한 사유이다. 필자가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 설립한 사학전통에 대해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한 것은 아닌지라 어떤 총체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두 명의 역사학자의 아시아에 관련된 사유에 대해 초보적인 논의를 시도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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