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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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녀의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일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그 기억이 과거에 들었을 부드러운 음악이나 단순한 죽음 같은 그런 기억이 아닌 까닭은 무엇일까?

독립 이후 무정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멕시코는 1876년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집권으로 정치적 불안의 해소와 경제적 근대화의 기반을 조성하게 된다.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민중의 편이었고 개혁가였으나 그 역시 (독립 후 몇 십년 간 출몰했던 제왕적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후에 독재자가 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이러한 독재의 이면에 놓인 인권탄압, 경제적 불평등 등으로 인해 결국 1910년-17년에 걸친 멕시코혁명의 불씨를 제공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를 그리고 있는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는 두 가지 층위에서 반 중앙집권적인 혁명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적 층위에서는 디아스 정권의 독재에 항거한 멕시코 혁명을 다루고 있으며, 구조적으로는 단일한 목소리와 연대기적 시간구성을 가진 전통 서사에 대한 반성을 체현하고 있다. 영웅적 주인공이나, 전지적이고 초월적으로 이야기를 관장하는 서술자 없이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서로 뒤엉켜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뻬드로 빠라모>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재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의 의미로 동일화되지 않는 불협화음 속에서, 이질적인 목소리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성적 공간을 형성한다. 그 곳이 꼬말라이다.

꼬말라는 마술적 공간이 아니다. 억압과 착취에 온몸으로 반발한 영웅이 초월적 존재로 변신하였음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마술’도 존재하지 않고(<지상의 왕국>), 현실에서 벌어질 법하지 않은 일이 태연하게 일어나는 마콘도의 마술(<백년의 고독>) 또한 꼬말라에서는 찾을 수 없다. 꼬말라의 다성적인 공간은 과거의 목소리가 여전히 공명하고 있고, 죽은 자의 기억이 여전히 살아 있을 뿐이다.

<뻬드로 빠라모>는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지상의 왕국>에서 보여주는 마술, 혹은 전복 의지와는 차별성을 보여준다. 프랑스인의 착취에 반발하다 화형에 처해진 마깡달이 부활해서 새가 되었다는 믿음은 해방을 갈구하는 흑인노예들의 바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바램은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현실이 된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식민체제가 불안정해지면서 흑인 노예들은 자유를 요구하며 폭동을 감행한다. 마술적 믿음이 현실이 되었다는 까르뻰띠에르의 설정은 마술적 믿음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며, 마술적 믿음이 결코 비이성적인 것이나 황당한 주술만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앙리 크리스토프의 집권으로, 다시 물라토의 공화주의 체제 등으로 지배자만 바꾸었을 뿐 민중들의 노예상태는 변함없이 악화되었다. 이 모든 사태에 절망한 "띠 노엘"은 마술적 변신을 통해 도피하거나 이 세상을 초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 ‘지상의 왕국’에서의 혁명을 꿈꾼다. 이러한 각성이 하나의 인식의 전환인 것은 분명하나 <지상의 왕국>이 보여주는 마술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지배담론의 논리를 그대로 간직한 채 그 대립항으로서 발발한 혁명이 어떤 결과로 귀결되는지는 앞선 역사에서도 반복적으로 보여지고 있지 않은가.

이제 꼬말라라는 공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자. 후안 쁘레시아도가 어머니의 유언으로 찾아가게 된 곳이 꼬말라이다. 내리막길 끝에 있는 꼬말라는 아버지를 찾아 들어가는 공간이자 출구 없는 절망의 공간이다. "저 아래 보이는 마을"로 내려간 순간 후안 쁘레시아도는 끊임없이 死者와 만나게 되고 결국 자신도 죽음을 맞이한다.
후안 쁘레시아도가 처음부터 죽은 상태였는지 꼬말라로 들어와서 죽은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작가의 말대로 “꼬말라에 도착할 때는 살아 있었으나, 거기서 죽는 것”으로 보자.

  한밤중에 나를 깨운 것은 열기, 그리고 땀이었다. 온통 흙으로 감싸인, 아니 흙으로 빚은 그 여자의 몸은 마치 진흙탕에 용해된 것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에 허우적거리며 부족한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나는 거의 질식된 상태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이 든 그 여자의 입에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가까스로 토해 내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공기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나에게 달라붙은 열기는 떨쳐낼 수 없었다.
  공기가 없었다...


신화 속 이브의 형상을 한 여자와의 결합, 그 열기 속으로, 꼬말라의 대지 속으로 서서히 녹아 들어가면서 후안 쁘레시아도는 갑자기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이 장면을 경계로 이야기의 중심은 후안 쁘레시아도에서 뻬드로 빠라모로 옮겨가고 서사 방식도 미묘하게 변한다.

전반부에서는 ‘대화’가 없다. 내가 묻고 상대가 대답하며,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지만(즉 일반적인 대화상황은 있지만)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에 놓여 있다. 아버지를 찾아, 끊임없이 반복되는 오류의 역사를 찾아가 보지만 이해할 수가 없다. 공유되는 코드를 형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각자 자기 목소리만을 낼뿐이기 때문에 수많은 대화가 등장하지만 독백일 수밖에 없다.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과거가 계속 현재화하고 있는, 즉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재상영되는 꼬말라에서는 직선적인 시간관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로 소멸해가는 한 점으로 축소되고, 과거는 ‘기억’이라는 방식으로, 미래는 ‘기대’라는 방식으로 현재화될 수밖에 없는 수직적인 시간이 아니라 모든 과거가 수평축의 표면에 그대로 살아서 웅성대는 탈시간화된 공간이다. 과거는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혜성의 꼬리처럼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변형된 모습만을 남기고 떠나기엔 아직 하지 않은 너무 많은 말들이 남아 있다.

과거의 음이 여운을 남기며 사그라들어 끊임없이 현재의 음에 통합되는 조화로운 세계가 아니라, 그 각각이 동일한 강도로 울려 퍼지는 불협화음의 세계.

그들은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아직도 내고 있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독자와 같은 기대지평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후안 쁘레시아도는 상징적인 죽음을 겪게 된다. 후안 쁘레시아도는 꼬말라의 주민이 되었고 독자는 여전히 꼬말라의 외부, 텍스트의 바깥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제 독자는 양자택일해야 한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현실의 질서를 심판하고 재질서화하는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꼬말라는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되며 혁명, 멕시코 농촌의 삶, 사랑 등의 의미로 구성할 수 있다. 바로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그들과 친구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란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이 방식의 한계를 직시한다면, 꼬말라의 웅성거림을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 어떤 질서(그것이 어떠한 '질서'이건 간에)에서 오는 편안함을 즐기기보다는 혼돈을 혼돈 자체로 느끼도록 하자.  우리는 과거와 만나는 방식 자체를 변경해야 한다.

꼬말라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국가가 강요하는 하나의 목소리, 제도화된 역사라는 공식 언어의 테두리 내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과거와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꼬말라를 찾은 이상 단순히 듣는 척, 이해한 척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몸이 변화해야 한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말한 것과는 다른 맥락이 될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야 우리는 단순히 그들 옆에 누워서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으면서 걸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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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점 반 우리시 그림책 3
이영경 그림, 윤석중 글 / 창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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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점 반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금방 책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은 언제나 즐거워~
잘 볼께.

넉점반 참 재미있더라.. 그냥 한번 주욱 훓어봤는데..
1940년대에는 時를 點으로 불렀나보네.. 중국어는 아직도 點(띠엔)인디.. ^^;;

갑자기 어릴 적 생각이 나네..

울 할배가 아프실 땐데.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시다고,
200원을 주시면서 하나는 너 사먹고 하나는 사와라~ 하셨거덩.

당시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는 동네 초입에서 약간 벗어나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 '외말리'라고 불리는 곳에만 있었어.

거기까지 가서 당시로선 흔치않던 콘 아이스크림 두 개 사가지고,,
지나오던 길에 친구 만나서 자랑하고, 한참 놀다가, 어영부영..

머, 넉점반의 애기처럼 해질때까지 있진 않았지만, 여튼 한여름에 어영부영하다보니..
집에 도착했을 땐 아이스크림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더라구..

물론 내 껀 친구들 한입씩 주기도 하고, 콘 부스러기까지 벌써 먹어치웠으니 걱정없었지만.

기다리던 할배는 얼마나 안절부절하셨겠어. 안 봐도 뻔하지.

마구 호통을 치시더군.

호통이 무섭기도 하고, 사라진 아이스크림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머 그랬덩거같애.. ^^;;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라면으로 점심 먹기로 하고 물을 올려놨더라구.
만회하려고 물이 끓자마자 라면을 집어넣고 내가 직접 끓였지.
라면 여섯개 넣고 스프 넣고 남비뚜껑을 살짝 덮어놓곤, 기다렸지.
계란은 좀 있다 넣어야지..하면서.

근데, 기다리다 밖에서 친구들 노는 소리 듣고 잠깐 나갔다가 한참을 놀다 왔네. 라면은 머리 속에서 사라져버렸구.. 헤~~ ^^

그날 식구들 모두, 바닥이 약간 타게 눌어붙은 퉁퉁 불은 라면을 먹으면서,

나를 흘깃 쳐다보는데..

어린 나이에도 정말 미치겠더라.. ㅡㅡ;;

알다시피 라면 정도면 특식이었잖아..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더라구.

...
이제는 넉점반은 훨씬 지나 버렸고,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버린다. 라면도 넣자마자 익어버리구.. 그렇게 길고도 길던 시방이 짧아지고 짧아져,

"지금"라고 말하는 순간 그 지금은 이미 지금이 아닌 세상이렸다..

그래두, 할배와 아이스크림에 대한 내 기억은 여전히 시방이겠지?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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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란쏘 프라도 지음, 이재형 옮김 / 현실문화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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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나랑 똑같은 걸 보고 겪은 거야. 단지 그걸 나랑은 다른 식으로 해석했을 뿐이지."
                                                                                                             -- S.S. 반 디네.

"여긴 정말 이상한 곳이에요. 방파제는 엄청나게 큰데 배는 두어척 밖에 없고, 낙서들은 여러나라 말로 갈겨 쓰여져 있는가 하면, 여자 혼자 잡화점을 꾸려 가고, 그 여자 아들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으니...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고, 꼭대기엔 폐쇄된 등대만 우뚝 서 있는 아주 작은 섬에 이 모든 것이 다 모여 있다니.."

이 만화책은, 외딴 섬에 흘러들어간 한 남자와 그보다 먼저 와 있던 한 여자,
그리고 섬에서 여관, 술집, 식당을 겸해서 하고 있는 아줌마와 아들.
..정도가 등장인물의 전부다.

외딴 섬이니 뭔가 사건이 발생할 것 같다.
살인사건처럼 섬뜩한 일이 일어난 뒤 주인공에게 탐정 역을 맡겨도 되겠고, 아줌마와 여인을 둘러싼 삼각관계, 혹은 강간 정도는 나올 법도 하다, 아주 당연히..

물론 살인도 나오고 강간도 나오고 삼각관계도 펼쳐지지만 결코 사건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만화는 탐정만화도, 로맨스도 아니다.
각 에피소드는 파편화되어 있고, 그것들이 모여서 어떤 전체를 구성할 의지도 그다지 노출시키지 않는다.

하나의 끈을 잡고, 그것을 줄거리라 생각하고 끝까지 가더라도, 결국 독자는 자신이 타고온 줄기 전체를 재배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줄거리란 어떤 관계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원래 따로 떨어져 있던 명사들을 조사로 연결시키기.
한 곳에 고정된 덩어리들을 동사로 운동시키기.

<섬>에서 등장하는 각 요소(인물, 배경, 그림 등..)들은 모두 그 자체로 하나의 섬들이다.

연결이 되더라도 배와 섬의 연결일 뿐이고,
운동이 발생한다 해도 대륙이 되지는 못한다.

짧은 순간, 나름의 방식으로 상대에 대한 호의를 베풀고 어떤 인연의 끈을 잡아보려 노력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하나의 섬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주 긴 방파제를 가진 이 섬의 모양은,
바다 저멀리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에게 내민 손은 가끔, 혹은 항상,
상대의 가슴을 찌르는 바늘이 되곤한다.

책상 한곳에 꽂아두고 한번씩 그림도 들춰보고,
이리저리 내 맘대로 줄거리도 만들어보면 나름 괜찮을 것 같다.
그림은 하나하나 공을 들였고,
줄거리는 지겹지 않을 정도로 모호하다.
그러나 혹, 그러다 영원히 고립된 섬이 되어 버리지나 않을란가?


"우리는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어떤 섬에 배를 댔는데, 이 황량한 바위섬에는 도마뱀과 갈매기, 수줍음을 타는 노파와 말이 적고 거칠어 보이는 남자, 상스럽고 단정치 못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었다. 이 섬에서는 외딴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폐쇄된 등대를 제외하면 그들의 집이 유일한 건물이었다. 그 집은 더럽고 다 쓰러져가는 데다 썩어서 악취에 가까운 기름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아주 싼 값에 방과 음식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차라리 배에서 저녁을 먹고 자는 쪽을 택했다.

바로 그날 밤, 산드라가 꼭 샴페인을 마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다섯 잔을 마시고 나서 취하기 직전의 경이로운 영감의 상태에 사로잡힌 그녀는 등대에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마르띤은 거절했다. 그러나 나는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심연으로 이어지는 광채가 그녀의 눈에서 반사되는 걸 보는 순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 아르망 실라스, <욕망의 빛>, 1988.

"실라스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의 두 번째 에로틱 소설인 <욕망의 빛>은 자전적 체험을 다루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관심거리-불건전한 호기심-이다. 독자들은 언급할 만한 그 어떤 다른 가치도 이 책에서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A. 카사스, <욕망의 빛>에 대한 비평,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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