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배제된 동아시아 세계사로 탑승해야” 동북아 민족주의의 이상기류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한 일본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 전 도쿄대 총장을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가 25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이사장직도 맡고 있는 문화평론가 도 교수와 하스미 전 총장은 최근의 한·중·일 3국이 역사와 영토문제 등으로 마찰을 빚고 있는 현실을 염두에 둔 ‘동아시아 민족주의 이상기류’라는 화두를 놓고 대담을 했다.

도정일=이상기류라면 한-일-중 간 분위기가 오해 때문이든 민족감정 표출이든 심상찮다는 얘긴데, 우선 이상기류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하스미=3가지 정도를 얘기하고 싶다. 첫째, 프랑스 문학연구자로서 예전부터 생각해온 ‘75% 법칙’이라는 게 있다. 지금 이 지역에서 그게 구체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어느 국가 정책이든 정치, 또는 정치가나 정권이든 75%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민주주의에는 위험신호라는 얘기다.

예컨대 9·11 동시테러 때 조지 부시 미 대통령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미국민들이 더 이상 생각하기를 중단한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첫 선출 때도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75% 얘기가 처음 나온 건 1848년 프랑스 제2공화국 대선 때였다. 당시 루이 나폴레옹이 지지율 74.2%로 대통령에 선출됐는데, 3년 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다. 그때 지지율이 78%였다.

이런 일이 20세기에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이즈미 총리가 압도적 지지율로 총리가 됐을 때 민주주의에 위험 신호가 온 걸 눈치 채지 못한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도정일 고이즈미 총리 곧 일본은 정상인가? 하스미 독도·신사참배 과거 숨기려는 딴청 도정일=일본 얘기를 먼저 해주니 고맙다. 동북아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된다고 할 때 지식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생각하게 되는데, 먼저 자기 자신들부터 정상인지를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이즈미 총리 얘기는 곧 일본이 정상인가 묻는 얘기로도 들린다.

하스미=아까 얘기한 3가지 얘기 가운데 두 번째는 잘못된 문제 제기인데, 자기 내부의 국정이나 정권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잘못된 문제를 꺼내놓는 것이다.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독도 영유권 문제가 터져 나온 건 본질과는 무관한 잘못된 문제를 공론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뭔가를 감추기 위해서 그런 건데, 그게 무엇인가? 20세기에 일본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에 많은 고통을 안겨줬는데, 그건 한-일 또는 중-일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도, 당한 아시아인들도 그 사실을 잊고 있다. 그게 문제다.

도정일=궁금한 건 그 인류에 대한 범죄, 폭력행위로 얼룩진 과거로부터 일본이 단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독일의 예를 드는데 나치의 범죄행위와 단절한 것을 한국 사람들은 매우 중시한다. 일본도 한번은 과거사와 제대로 단절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윤리·도덕적인 문제를 계속 껴안고 가야할 텐데.

하스미=독일의 예는 일본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독일식 청산도 올바른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최근 중국의 경우도 일본에 대해 일부 군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건 틀렸다.

일부가 침략한 게 아니다. 75%의 국민이 동조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일부만 탓하는 건 옳지 못하다. 독일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나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다.

진정한 청산이 되지 않아 네오 나치세력이 다시 등장한 것 아닌가. 인류에 대한 범죄는 비난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인 문제가 뭔지, 장차 어떻게 할 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게 지식인의 의무다.

도정일=지금 한·중·일은 다른 지역사람들이 봤을 때 민족주의의 과잉상태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스미=지금 일본은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있기는 하되 철저한 건 아니다.

일부의 외부 질책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인데, 작은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75%를 넘던 고이즈미 지지율이 지금 42%로 떨어졌다. 처음의 흥분상태가 식은 것이다. 결정적인 민주주의의 위기는 없을 것이다. 대신 작은 위기들은 있을 것이다.

도정일=한국에서도 민족주의에 관한 얘기들이 많다. 일본 민족주의는 국가가 강성했을 때 국가주의와 결합한 이데올로기로, 중국과 한국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고 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절 국가 부재상태에서 국가를 되찾기 위한 에너지를 모으려는 민족주의였다. 중국의 경우도 가장 어려웠을 때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말하자면 저항 민족주의라는 건데, 헤게모니를 노린 민족주 퓻姑?구별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체로 그런 식의 구분을 해왔는데, 최근에는 젊은이들 중에 작은 자긍심이랄까, 아까 말한 작은 민족주의랄까, ‘대한민국주의’ 같은 걸 표출하고 있다. 아주 다른 두 가지 경향이다.


도정일 독일처럼 과거 제대로 단절해야 하스미 일부만 탓하는 청산 찌꺼기 남아 하스미=매우 재미있는 지적이다. 토론이나 평가 없이 너무 지금에 집착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 시대나 사회 배경 등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 아까 얘기하다 만 세 가지 중 마지막 세 번째 얘기를 하자면, 동아시아 문제는 아직도 세계사에 등장하지 못한 채 도외시되고 있다는 것인데, 1998년에 베이징대학 설립 100주년을 맞아 그 기념행사에 초청돼 현지에 갔다. 그날이 5·4운동이 일어난 날이어서, 일본인으로서는 곤혹스럽지만 5·4운동이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저항운동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자리에는 캠브리지나 하버드 대학 등의 총장들을 비롯해서 초청받은 외부인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5·4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성균관대학 설립 600년 기념행사에도 초청돼, 유교 전통의 요람인 그 대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때 불탔고 일제 때는 총독부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유럽 대학들에서 온 몇몇 인사들이 나더러 왜 그런 사죄를 해야 하느냐는 투로 얘기했다. 유럽과 미국인들은 독일과 아우슈비츠에 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본과 한국이 공유해온 과거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일제가 한국을 얼마나 가혹하게 지배했는지에 대해서는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 문제 역시 인류 전체의 문제이지 한-일만의, 중-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바로 그런 게 아닌가 통감한다. 한-일, 중-일, 한-중 3국 간 문제로 왜소화하지 말고 세계사적인 문제로 공론화해야 한다.

도정일=동아시아 3국 간에 더 긴밀한 협력이 바람직하다. 경제협력은 아무리 3국 간 사이가 나빠져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오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뒤 이들 나라는 각기 다른 정치적 경험을 해왔다. 다투면서도 공통의 정치·문화 유산들을 지켜온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엔 공통의 유산이 없다.

동아시아가 세계를 향해 발신한다고 할 때 경제가 아니라 지적이고 도덕적인, 정신적인 가치에 치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하스미=<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이 한국과 일본은 다른 문명이라고 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돼 있는데 그냥 둬선 안 된다. 단지 영어로 씌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엉터리 내용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것은 지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정리/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하스미 시게히코는? 하스미 시게히코는 193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와 파리 4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으며, 도쿄대 교육학부 교수와 학부장을 거쳐 총장을 지냈다.

지금은 이 대학 명예교수다. 프랑스문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상징문화 및 영화 평론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링>을 감독한 나카타 히데오를 비롯해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등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들을 지도했다. 대표 저서로 <평범의 발명> <반일본어론> <영화의 기억장치> <필름 루나틱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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