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눈에 안 들어와서 다른 책을 집어든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글을 잘 쓴다는 것"..

제목을 보는 순간,. (에코 식으로) "리폿 잘 쓰는 방법", 혹은 "리폿, 어떻게 쓸 것인가" 등의 제목으로 읽혀버리다.
과연 글을 잘 쓸 수 있는 혜안이 담겨 있나 함 보까.

길지도 않으니 몇 문장만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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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 (쓰다 보니 거의 전부를 옮겨 버렸다 ㅡㅡ;;)

우뛰! 그래.. 내가 글이 더디고. 말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
그런데 말야.
자기가 생각한 것만큼을 잘 말하는 것하고, 더 많이 생각하기 위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하고. 어느 게 더 좋을까?

이리저리 떠오르는 너무나 많은 생각에 길을 잃는 게 안 좋은 줄은 알거덩. 그러나 끝없이 갈라지는 그 가능성들을 잡아내기 위해, 아직 모르지만 더듬더듬. 머라도 잡아볼라꼬 욕심 부리는 거 아닌감?

당신도 글케 이야기하는구먼. "말한다는 것은 (이미 생각하고 있는 만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실현(!)"이라고.
그 사고의 실현은 '생각한 그만큼'이 육화되는 건가?

난 오늘도 공을 못 칠지 몰라.
그래도 내 파워가 허락하는 한. 최대의 포즈로 스윙을 연습하는.
조악한 타자가 될테얌.  헤헤.. 우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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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썰렁함'이란 개념에 대해선 몇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해볼 수 있다.

하나의 정책으로서의 썰렁함은, 이제 내 고유의 특질이 된 듯이 평가되는 느낌이다.
썰렁함이 정책인 이유는 이것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내 체질개선을 위한 하나의 의도가 깃든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행위로서의 썰렁함이 나라는 인간을 대표하는 특질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그 내부에 은폐된 전도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하나의 동사가 하나의 명사로 굳어버린 것에 비유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나는 그다지 사람과 친해지지 못하고, 친해지더라도 미리 설정된 경계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에게 이런 경계는 있을 터이다.

오히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모든 경계를 허물고, 아니 경계 자체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더 접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분명 내가 미리 경계를 설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딱딱함 자체를 견딜 수 없다.

썰렁함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으로 선택된 타개책이다.
일견 썰렁함이 더 딱딱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썰렁함은 얼음이란 단어를 함장한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견고한 언어에 약간의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전혀 의도하지 않은 '실소'를 터트리게 하는 의도적 행위는 분명 화기애애함으로 나가기 위한 한 과정이 될 수는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곧바로 화기애애해지고, 아주 따뜻한 분위기로 시종일관한다면 그보다 좋을수 없다.
그러나 사는게 그런가?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탐색전을 벌이는 그 애매한 공간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그 공간은 주인 없이 객만 존재하는, 그래서 그 애매함이 더 지속되는 공간이다.

석사학위 논문발표장에서, 선생들이 들어오기 전에 그 어색한 분위기, 느껴본 사람은 알거다.
말쑥한 정장 입고서, '2% 부족한 논문이지만 잘 봐달라고 하면 선생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로 시작되는 몇마디를 터트리곤, '저 놈이 이런 자리에서도 정신 못 차리네~'라는 실소로 공간을 채우고 나니,
그 자리가 그렇게 편할 수 없더라.. 발표도 편하게 했고.

너무 익숙하게 사용되는 기표를 전혀 다른 기의와 연결시킴으로써 생기는 잠깐의 머뭇거림, 그 찰라의 공백이 팽팽한 긴장상태를 잊게 한다. 이어서 터지는 웃음. 물론 이 웃음 자체는 따뜻하지 않다. 자기가 순간 웃고도 나에게 화를 내는 (나로선) 황당함을 유발하는 웃음이다. 그러나 이 웃음 뒤에는 새로운 공간이 열리고, 새로운 관계가 맺어진다. 나는 잠깐 그 사람과 가까와짐을 느끼는 것이다.

관계에서의 이 효과는 언어에 대한 '낯설게하기'로서 가능하다.
익숙한 모든 것에 대한 재고를 강요하기.
따라서 이는 언어를 낯설게 함으로써 관계의 낯섬을 타개한다는 상당히 모순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愛了니'就'irony'!!

춥다 하면 추어탕 먹어러 가자하고, 에이 썰렁해~ 하면 설렁탕 먹어러 가자 하다가,
정말 추워 죽겠네~ 하면, 니가 추우면 나는 그저 부추어(不錯!!)지롱~~

이라고 연발해 상대를 꽁꽁 얼어붙게 하지만,
내 의도는 항상 상대와 가까워지기, 공간 자체의 화기애매함이었다.


이런 내 의도와는 달리 '썰렁함'을 하나의 행위가 아닌 특정인의 특질로 본다는 것은 비극이다.

언어라는 공통공간을 상정한 상태에서 이미 만들어진 사물들만 주고받으면서 서로 소통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언어가 담아낼 수 있는 것, 우리 시각이 보아낼 수 있는 그 정도에서 머물려는 게으름의 소산이기도 하다.
물론 거짓이나 게으름, 불감증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서로 소통되고 있다고 안심하기 위해 불가결한 것이긴 하다.
전혀 새로운 사건이 벌어져도 그것은 그저 '화재'사건, 혹은 '강간'사건일 뿐이다. 그렇게 묘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르포르타주의 언어이다.

그러나, 똑같은 사물을 보고서도 전혀 다른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똑같은 언어에도 전혀 다른 감정을 담을 수도 있다.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다른가.
시인은 그저 예쁘기만 한 꽃에서 어떻게 그런 것들을 감각하는가.

썰렁함은 분명 '언어 이전'을 추궁하고, 불가능하지만 어떻게든 언어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시적 언어는 아니다.

그러나, 일단은 한발짝 발을 딛어 보자. 운동방향은 다를 수 있지만 썰렁함을 통해 나는 언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언어 이전의 생성을 생각하고자 한다.

내 이런 태도는 끝까지 밀고갈 터이지만, 내 이런 행위가 만약 나를 어떤 하나의 '명사'로 고정하는 것이라면 자제하도록 하겠다. 이 태도는 강요로 행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소쉬르, <일반언어학강의>, 민음사.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작과비평사.
마루야마 게이자부로, <존재와 언어>, 민음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카넷.
졸고, <썰렁어록>, 미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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