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블로흐의 미덕은 역사 속에서 지속되는 유토피아의 상에 대한 그의 집념에 있다. 이러한 집념은 청년 헤겔주의자이자, 맑스주의자로서 그가 늘 견지하는 이론적 방법론으로부터 유래한다. 사실 블로흐의 유토피아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폐기처리된 어떤 유령에 신체의 옷을 입히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텍스트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강신굿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의 방법은 곧 그의 '신념'이기도 한것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포스트 맑시즘의 시각에서 이 신념은 교육적인 목적에서 매우 유용할지 모르지만, 이론의 당대성과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루하다고 공격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블로흐의 이 책은 철학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매번 간과하고 마는 '당대성 자체' 다시 말해, 지성사가 아니라 당대성 속에서의 지식이라는 유물론적 철저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철학적 업적들을 경제사에 끼워 맞추는 억지를 부리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아주 담담하게 지성사는 곧 혁명사며, 그것이 계급적 변혁 또는 변혁의 시도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이해될 때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독자에게 이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철학사'가 아니라 '철학강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전공자라면 흔히 코플스톤의 철학사 시리즈를 철학사 공부의 대계인양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은 매우 편협한 것이다. 철학사는 곧 철학사상이다. 따라서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그의 철학사상일 뿐 철학사의 캐논이 될 수 없다. 철학 자체에서 '정전'이라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철학사라는 지적 발췌와 편집이 필수적 과정인 책에서 그러한 규정은 더 가당치 않다. 사실 누구나 철학사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탁월한 철학사는 그리 많지 않다. 우선은 기술적으로 간명해야 하지만, 저자 자신의 관점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분명한 어조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득력'일 것이다. 논리적인 설득력은 글쓰기의 잔재주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통찰과 자신의 관점에 대한 농익은 반성의 결과 생겨날 수 있다. 블로흐의 이 철학사는 그런 점에서도 탁월하다.

중세 말의 암울함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더불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인 혁명적 사고를 불어 넣었다. 이른바 혁명적 평신도 사상이 그것이다. 이것은 유럽 지역의 농민 운동을 지지했는데, 그중 독일 농민전쟁은 정점을 이루었다. 이들과 재세례파, 도시 프롤레타리아들은 하나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중세 평신도 운동과 신비주의는 아카데믹한 철학사에서 잘 기술되지 않는(어쩌면 전혀 기술되지 않는) 역사다. 하지만 이는 매우 중요하다.
이 사조에 속한 인물들은 대개 평민출신들이다. 즉 교회에 속하거나, 교회에 대한 일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이 등장한 것은 중세의 피폐한 생활환경과 빈번한 폭동이 그 배경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메시아이면서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교회가 아니라 자신이 내면의 신앙이 더 중요했다.
"우리는 성당의 어떤 중개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계시다. (...) 그리스도의 원수는 성직자들이다. (...) 이들은 왕, 제후, 착취자, 우리를 부려먹고 찢어 먹는 자들의 명령에 복종한다. 우리를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내면의 정신, 열광적 정신이다. 이러한 열광적 정신은 성당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단종파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활동하던 그 시기에 대학에서는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보나벤투라, 둔스스코투스, 오컴이 가르쳐지고 있었다.
이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니교였다. 마니교는 일단의 평민들과 혁명적 종교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중 야콥 뵈메가 가장 특출났다.

당시 주류 교회와 이단적 종파간의 대립에서 유의해서 봐야할 점은 바로 `자연법`에 대한 견해 차이다. 주류 가톨릭 교회는 상대적 자연법만을 인정하였다. 본래의 자연법은 인간에 의해 타락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다. 하지만 이단종파들은 절대적 자연법을 인정한다. 이들에게 이 자연법은 천국의 법이며, 앞으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 상태는 국가도 계급도 없는 상태며, 공산주의적인 삶이 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신비주의`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무언가를 은폐하고 가린다는 `내부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으로 어떤 것이 드러난다는 `외부적` 의미이다. 전자는 반동적인 권력사상으로 나아가며, 후자는 평신도 운동과 유사한 민중운동으로 나아간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이 가진 혁신적이면서도 이단적인 부분은 바로 신과 인간이 서로 조력한다는 주장이다. 신과 인간은 서로의 진정한 삶과 영혼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신의 창조론을 완전히 전복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인간을 신이 자신이 형상대로 만든 것처럼, 신은 인간의 형상 속에서 끊임없이 재창조된다. 그에 따르면 `신은 함께하는 깨달음 안에서 인간을 태어난다`
"인간이 곧 신이다" - 에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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