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니힐리즘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박찬국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1932년에서 40년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는, 하이데거가 강의하던 '니체'와 함께 전쟁선동이 막 정점을 향해 가고 있던 총통 히틀러와 나치의 깃발이 공존하고 있었다. 1933년, 후설 이후 이 대학 총장직을 이어받은 하이데거가 이런 정치적 변화들에 무감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를 '위해' 이 강의를 하였다기 보다, 니체와 니체의 시대를 하이데거 자신과 그의 시대의 알레고리로 읽어내려고 한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밝히고 있다시피, 시대를 초월하는 철학이 가장 부적절하고, 그렇다고 철학이 반시대적이지도, 시대에 부합하지도 않는 것이라면, 철학은 시위를 떠나기 전의 화살도 시대의 정점을 표시하는 과녁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전히 활의 시위 자체, 그 긴장의 점철과 연속일 뿐이다(243). 따라서, 이 강의, 혹은 이 책에서 하이데거가 니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란 일정한 전통 위에 니체를 배치하고, 그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전통이란 이때, 플라톤 이래 서구 형이상학을 지배해 왔던 존재망각의 역사 자체를 의미하며, 그 가장 비근한 친족으로 데카르트를 위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동명의 니체의 책, 『반시대적 고찰』)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러한 전략이 가지고 있는 함의에 처음부터 의구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하이데거는 대가다운 세심함과 철저함으로 스스로의 관점에 오류가 없음을 천명하고, 단지 그 텍스트의 선정에 있어서 협소했음(「부록」)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많은 니체 해석자들이 파악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이데거가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은 니체 후기 저작군(群)들 중 중요한 대목들에서였으며(백승영), 특히 그의 초인 사상에 관해서 중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비중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니체는 오해되고 있었고, 그 진의가 완전히 왜곡될 정도로 은폐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니체해석에 있어서는 하이데거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정당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인 것이다. 예의 그 문학적이고 낭만적인 니체 해석이 횡행하던 시절에 하이데거는 그러한 해석이 가질 수 있는 가당찮은 오류들을 책상 머리에서 제쳐두고, 모든 것을 니체적 사태, 즉 사건(Erignis) 자체에로 지향했던 것이다. 따라서, 니체에 관해 어떤 식의 낭만적 우상화나 분석적 비하를 은연중에 품고 있는 독자들은 마땅히 하이데거의 해석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끝내 밝혀낼 수 없을지도 모르는 하나의 질문을 던져 두고자 한다. 도대체 하이데거가 니체를 연구하면서, 또 그 이후 어째서 나치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질문 말이다. 철학이 삶과 함께 하고 그 삶이란 처음부터 정치적이라면, 하이데거의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든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불충분했던 것일까? 그는 반유대주의자 프리취에게 보낸 니체의 경멸 섞인 서한을 몰랐던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철학사에 이 특유한 국면, 즉 하이데거적 '결'을 대가의 실수를 대하는 당혹감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종심급에서 철학이 삶의 결을, 또 삶이 철학의 결을 결정한다면 그러한 징후들은 반드시 철학 내부에 존재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이데거의 니체가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정점을 표현한다고 하는 대목을 접하게 될 것이다.

니체의 말에서는 셸링과 헤겔,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즉 근대 형이상학의 근본입장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말하고 있으며 그것도 실로 데카르트가 정립한 근대형이상학이 말하고 있다. 니체 자신은 근대 형이상학을 개시한 데카르트와 결별했다고 믿었을지라도 말이다.(69)

다시 말해, 니체의 아우라는 데카르트다. 그러나, 그 후계자가 끝내 부정하고자 하는 아우라며, 그래서 더욱 강력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데카르트는 근대적 주체 즉, 코기토의 창립자이며, 문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불분명한 전제에 근거하고 있지만, 니체 자신이 그러한 데카르트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Cogito ergo sum'은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의 근본명제가 된다. 그것은 어떤 전제의 전제보다 더 명백한 것이며,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배'하는 근본 판단이다. 그러므로, 이 판단명제의 객관적 명증성은 추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직관으로 명약관화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한 직관을 토대로 펼쳐지는 이성의 활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유'다. 데카르트에게 사유란 '표상성'이다. 이성은 형이상학적 대상으로서의 범주(Category)를 인식하며, 그것만이 형이상학의 대상으로서의 근본표상이 된다. 사유가 표상을 다루는 한에서 표상은 Cogito 또한 표상한다. 이때 Cogito는 어떤 다른 표상과는 달리 스스로 표상하는 바, 그 표상을 표상하는 표상이라는 이중적 규정 속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니체가 만약 사유를 자신의 철학의 인식론적 원리로 인정한다면, 데카르트가 전제하고 있는 그러한 표상성을 은연중에 인정하는 것이 된다. 하이데거가 착목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니체의 공과는 이러한 데카르트적 전제를 정점에까지 밀어 올렸다는 데 있다. 주체성. 다시 말해, Cogito의 가능성을 실체적으로 고양시키는 것 말이다.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서구의 역사가 지금 그것의 완성기로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는-시대는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되는 것, 즉 모든 대상화와 표상가능성의 근저에 놓여 있는 기체(基體, subiectum)이다. 니체가 근대의 형이상학을 정초한 데카르트를 아무리 예리하게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데카르트가 인간을 아직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체로서 설정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기체를 에고(ego) 즉 자아로서 표상하는 것, 다시 말해 기체에 대한 '에고이스틱한' 해석이야말로 니체에게는 아직 충분히 주체주의적(subjectivistisch)이지 않은 것이다. 존재자들에 있어서 인간이 갖는 무조건적 우위에 대한 설로서의 초인에 대한 설에서야 비로소 근대 형이상학은 자신의 본질을 완전하면서 동시에 극한에 이르기까지 규정하게 된다. 이러한 설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최고의 승리를 구가하는 것이다.(84)
 
하이데거가 바라보는 초인은 따라서, <존재자들에 있어서 인간이 갖는 무조건적 우위>에 선 인간 주체가 된다. 이때, '존재자'는 데카르트적 방식의 표상이며, 그 표상을 지배하고 그것에 대해 명령하는 지점에서 주체는 비로소 Cogito를 넘어 초인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하이데거가 처음에 전제했던 이성-범주로서의 주체가 니체에게는 문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이데거에게도 이것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따라서, 온당하게도 니체의 주체가 온전히 이성-범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것은 의지(volo)이며, 엄밀하게 말하자면,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다. 이렇게 해서, 하이데거는 니체철학의 핵심에 와닿는다. 그리고, 우리가 애초에 말했다시피, 하이데거 이전에 그토록 왜곡되었던 니체 '철학'의 내용을 매우 올바르게 지적하게 된다. 권력에의 의지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성격, 다시 말해, 권력에의 의지야말로 권력의 본질규정이라는 것을 하이데거는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 따라서, 권력은 그 자신만을 목적으로 삼으며, 진리나 이데아와 같은 가상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증대하는 권력만이 참된 권력이고, 스스로 지배하기를 멈춘 권력은 사멸하는 어떤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진리와 이데아가 완전히 불필요해 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필연적인 오류>며,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가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권력이 가지고 있는 본질로서의 권력에의 의지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회귀. 하이데거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리고, 오늘날의 대부분의 아카데믹한 해석자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다. 하여간, 권력은 그 자신만을 목적으로 스스로를 확대하고 증가시키므로, 이러한 패턴에서 '동일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문턱이 존재한다. '생성'이라는 것. 니체에게 영원회귀를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하이데거는 알고 있었다.

모든 존재자가 권력에의 의지로서 즉 끊임없이 자신을 강화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지속적인 '생성(ein st ndiges Werden)'이어야만 하고 이러한 생성은 그러나 결코 자신에서 이탈하여 자신 밖의 어떠한 목적을 향해서 나갈수 없으며 오히려 항상 권력의 고양의 원운동 안에 진입하면서 오직 이 권력의 고양에로 귀환할 뿐이므로, 존재자 전체도 또한 이러한 권력의 생성으로서 항상 거듭해서 스스로 회귀하며 동일한 것을 재현하지 않으면 안된다.(32-33)

그러나, 이때의 생성은 '동일한 것의 생성'이다. 동일한 것은 '권력'이며, 생성은 '고양'과 '귀환'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에게 권력의 고양과 귀환은 동일한 것의 그것이며, 양적인 것이다. 질적인 변화가 고려된다면, 생성은 결코 동일한 것으로 회귀할 수 없다. 니체도 그러한가? 우리는 의구심을 품는다. 우리에게 생성을 긍정하는 니체는 디오니소스며, 짜라투스트라이고 또한 아리아드네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결절점이 형성되는 것인가? 하이데거가 파악하는 니체가 형이상학자로서의 니체, 즉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의 완성자이자 그 정점을 표현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만 한다.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마치 실천적 요청(!)처럼 매번 강조된다. 그리고, 여기서 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은 데카르트에 와서 일정한 완성을 보는 표상성의 형이상학이며, 주체적 형이상학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것은 생성이 아니라 '존재(einai)'의 형이상학이다. 하이데거가 이 사실을 간과할리 없다.

그는 니체적 니힐리즘을 <고전적 니힐리즘> 또는 <극단적, 탈-자적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하면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때 '니힐'은 온전히 '무(nicht)'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며, 그것은 존재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마치 '비합리주의자가 합리주의를 분쇄하기 위해 합리주의에 더 밀착하듯이 무신론자가 신을 부정하기 위해 신에 더 가깝듯이' 니힐리즘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존재'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 따라서, 니힐리즘은 그 스스로의 본질규정인 '존재'를 철저하게 부인하고서야 온전히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는 니힐리즘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고전적 니힐리즘은 존재망각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된다. 니체에게는 어떤가? 니체에게 애초에 존재로서의 존재 자체가 있었던가? 우리는 니체의 '존재'를 '생성'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 다시 말해, 니체의 존재는 '생성'의 존재이지 '존재의 생성'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것을 거꾸로 세운다. 이것을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의 필연적 귀결로 이해할 수 있다. 서구 형이상학 전체를 '존재망각'의 역사적 심화로 해석하고, 자신의 철학을 새로운 '존재사유'로 이해하는 하이데거에게 '생성'으로서의 존재가 들어설 여지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회귀를 늘 동일한 '존재'의 회귀가 아니라, 늘 차이나는 '생성'의 회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권력에의 의지는 다시, 늘 다른 것들을 추구하며, 그것을 지배하고 욕망하는 권력의 본질규정일 것이다. 더 나아가 여기서 주체란 권력에의 의지에 다름 아니며, 그렇다면, 표상되는 바 그 표상의 근거로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때 주체는 가상이며, 권력에의 의지만이 (생성으로서) 존재한다. 인식론적으로 해석과 평가의 활동을 펼치는 권력에의 의지는 그것만으로 자기충족적일 수 있는 것이다. 주체란 여기서, 권력에의 의지가 펼쳐내는 차이들의 스펙트럼일 뿐, 어떤 개체적 특유성을 향유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Cogito란 권력의지의 분열자이지, 권력 자체를 추구하는 동일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Cogito는 파산한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분석이 정당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표상들의 기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표상들의 한 내용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권력에의 의지 뿐이다. 우리의 분석은 이 지점에서 표상성 자체를 의문에 부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보았을 때, 권력에의 의지는 표상성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표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보다 근원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생성의 주체(주체의 생성이 아니라)인 권력에의 의지인 것이다.

하나의 함정이 자꾸만 우리를 가로막는다. 주체라는 형상 말이다. 우리가 권력에의 의지라고 했을 때, 자꾸만 우리를 가로막는 '주체'는 매우 인격적으로 상정될 수 있다. 그러나, 보아왔다시피, 그것은 인격적 함의를 띄고 있지 않다. 마치 평가와 해석을 행하는 것을 '주체'라고 놓았을 때, 우리가, 모든 표상을 끌어 모으고, 지배하는 하나의 다른 표상으로서 주체를 놓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권력에의 의지를 이해하고야 마는 것이다. 문제는 마찬가지로 '표상'이다. '표상'의 본질이란 수동적 힘의 반영인 바, 지배당하고 해석 '당하기'를 바라는 대상일 뿐인 것이다. 이러고서 우리는 그 지배의 '주체'를 그 대상의 반대편에 설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참으로 <표상이란 개념은 철학을 독살>(들뢰즈)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그 표상을 제거하고 권력에의 의지만을 바라본다면, 여기서 지배와 복종, 해석과 평가는 늘 새로운 관계 안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석과 평가는 권력의 양과 질에 따라 증감하기도 하고 그 모습을 변형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지배와 복종은 (주체가 아니라) 각각의 권력에의 의지가 펼치는 차이의 놀이가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방식은 여기까지 다다르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는 생성에 앞서며, 주체는 표상에 앞선다. 하이데거는 니체도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권력에의 의지, 영원회귀를 니체 철학의 정수로 해석한 하이데거는 그 내용의 '급진성'을 올곶게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 니체철학의 급진성은 하이데거의 판단과는 달리 데카르트에서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 했던 질문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하이데거를 '위해' 답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삶이 선택한 정치적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철학은 그 질문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 이 강의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에게 니체는 주체성의 철학자며, 따라서 그 주체가 '누구'인가에 정치적 판단이 놓여지게 된다 는 것. 그렇다면, 그(들)는 히틀러인가? 나치인가? 아니면, '금발의 야수', 아리안 종족인가? 다시 한번, 우리는 하이데거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의 짧지만, 매우 시니컬한  결론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지 않았는가?"<NomadI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