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과 제국 아우또노미아총서 30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정남영.박서현 옮김 / 갈무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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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가 하트와 함께 [제국]을 출판했을 때, 학계와 사회운동계는 환호성과 우려를 함께 쏟아냈다. 현재로서는 환성을 지른 쪽이 세계 사회 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고, 운동의 흐름을 네그리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공식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려하던 축들(주로 캘리니코스 등)도 이제는 네그리와 하트의 개념들이 현실정합성을 전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그리가 '다중'과 '비물질 노동'을 이야기할 때 다소 어두운 지역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혹시 이건 내가, 또는 먹물들이 현장이라고는 머리속에 떠도는 상상으로만 겪어 본 것 뿐이라 그런 건 아닌가? 네그리는 이 책을 통해 그 의문에 일정정도 우회적으로 답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들의 관점을 난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 대답은 말 그대로 '우회적'이다. 즉 '우회적인 비판'이다. 투쟁의 현장에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긴 [뉴욕열전]의 저자인 코소가 네그리를 들뢰즈와 더불어 인용하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먹물스러운 내 정체성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좌파의 대부분이 아나키즘이나 자율주의를 '반동'이라느니, '소부르주아 이론'이라느니, '노동가치 이론의 폐절'이라느니 '무식한' 말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땅에서 네그리와 그것을 처음 소개한 조정환 선생 그리고 갈무리의 공헌은 지대하다 할 수 있겠다. 논쟁을 통해 자율주의를 번식시키는 데 일조하신 그 모든 '헛소리들'에 일정정도 경의를 표하면서, 네그리의 말들을 경청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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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발췌와 코멘트]

서론 : 설명해야 할 몇 개의 개념

[7]우리(마이클 하트와 나)가 다듬어낸 방법론이 분명 개념에 도달하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념적이지 않은, 미리 고정되지 않은,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개념이다. 그 개념은 ‘공통된 이름’nome commune이라 불린다. 우리의 방법은 진정으로 유물론적이다. 그 핵심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을 명명하고 경험에 기초하여 그것들에 다소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정의(定義)가 도달한 확대된 일반성을, 특[8]징 짓고자 하는 것이다.

[R-Commentary] 이 과정 속에서 물론 연속적인 것들이 분절되며, 그런 와중에 놓치는 개별적인 것들(the individual)이 있을 수 있다. 확대된 일반성은 그러한 놓쳐버린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즉 잔여(residuum). 잔여적인 것들의 들끓음, 이것은 이론의 운명일까?(나는 지금 해묵은 보편논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12]문제는 국민국가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가 (전쟁을 행하는 권력 혹은 화폐를 주조하는 권력과 같은) 몇몇 근본적 권력들을 이전하는 때에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문화, 언어, 정보에 대해서도 국민국가는 더 이상 중심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는 적대적 흐름들이, 그리고 다방면에 투입되는 언어와 문화가 국민국가를 지속적으로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국민국가가 스스로를 헤게모니를 쥔 존재로서 제시할, 그리고 문화적 과정을 통제할 가능성을 제거한다.

[R-Commentary] [제국]에 대한 오해의 매듭 하나. 그렇다면 국민국가가 ‘경향적으로’ 끝나가고 있다, 는 어떨까?

[13-17: ‘지구화와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여러 입장들]

1.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입장-국민국가가 배제된 지구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 지구화는 국민국가의 발전으로부터 동력을 얻고, 민주주의는 국민국가 내에서만 가능하다. 주로 노동조합에서 옹호하며, 서구 민주주의 급진적 좌파 그룹의 넓은 층이 공유하고 있다. 폴 허스트(Paul Hirst), 그레이엄 톰슨(Grahame Thompson). 이와 관련하여 미국 제국주의의 팽창을 지구화를 동일시하면서, 유럽의 팽창을 문화적인 방면에서 강조하는 주장. 제3세계론에 연원을 두는 주장들. 요컨대 이는 좌파적 입장이다.

2.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적 입장-지구화와 민주주의의 양립가능성 주장. 지구화와 문화적 혼합, 무역의 조화가 지구적 시민사회의 이상을 앞당긴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세계정부에 대한 낙관까지. ‘조화’를 열망하는 좌파들의 휴머니즘적인 버전. 리처드 포크(Richard Falk), 데이비드 헬드(David Held), 울리히 벡(Ulich Beck).

3.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입장-낙관론의 우파 버전. 지구화=민주주의의 지구화. 미국적 삶의 방식에 대한 최종승리 확인. 역사의 종말 테제. 토마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4. 전통주의적 보수주의 입장-비관론의 우파 버전. 국민국가 통제 쇠퇴=전지구적 무정부주의. 미국적 삶의 방식 확대가 국가 정체성 혼란을 야기할 뿐이라는 주장. 다문화 혼합, 가치 혼종에 대한 거부. 문명의 충돌로 인한 혼란. 존 그레이(John Gray), 쌔무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17]이 입장들 각각은 (...) 결론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 『제국』의 방법론적 차별성은 (...) 지구화 과정을 최종적 표상에서보다는 그 동학에 있어서 고찰한다는 점에 있다. 자본주의 발전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의해 본질적으로 결정되는 동학이다.

(...) 이 현상들이 자본의 관계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는 데 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과학적인 『제국』의 주장이다. (...) 우리의 삶의 상황을 이루는 계급 대립, 권력에 대한 우리의 경험,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저항 및 탈주의 실천, 그리고 우[18]리가 구성하는 바로 그 노동 활동, 이것들은 사실 맑스가 경험했던 것과 다르다. 투쟁, 즉 자본 관계가 사회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모든 정치적 실재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것으로 남아있더라도 말이다.

[R-Commentary] 이 ‘자본의 관계’에는 반드시 ‘노동자/노동의 힘’이 중심이다. 또는 적대의 당파적 경향성이 존재한다. 오뻬라이스모의 네그리라는 걸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제국」에 관한 안또니오 네그리와 다닐로 졸로의 대담

[24]우리는 푸꼬와 맑스를 함께 취했습니다. (...) 저의 오뻬라이스모Operaismo적 맑스주의를 프랑스 탈구조주의의 관점과 교배시켰던 것입니다. (...) [25]공장으로부터 사회로 착취 과정의 계보학을 이동시킨 푸꼬의 맑스 독해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 푸꼬는 분명 자유를 지향하지만 개인주의적이지 않은 인류학의 저술가이며, 더 이상 개인이 아닌 (특이성들로 충만한!) 주체를 형성하는 삶정치의 구축자입니다. (...) 롤스John Rawls나 하버마스 같은 근대의 창백한 계열과 단절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계급투쟁에는 필요한 변경을 가한 사유가 요구된다는 점을 마키아벨리와 함께 (그리고 모든 다른 이들과 함께) 인식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R-Commentary] 푸꼬의 ‘삶’에 대한 배려는 맑스의 ‘계급’에 대한 전유와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 이때 중요한 것인 ‘신체’의 문제는 아니겠는가? 인간 중심적인 그런 신체가 아니라, 에너지의 흐름, 기계와 연합한 노동의 흐름이 응결되는 일종의 매듭으로서 개별-집합체로서의 신체, 또는 사회체.

[27]제게 맑스주의의 회복과 그 혁신은 기독교사의 초기에 교부들의 호교론이 가졌던 바와 같은 강력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적 의미의 ‘원리로의 회귀’입니다. (...) 그것은 역사의 변증법에 대항하여 비목적론적인 계급투쟁론을 구축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본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완전히) 포섭한 시대에 이루어지는, 일반지성을 통한 가치화에 대한 분석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론과 관련해서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합치점인) 주권을 착취를 실행하는 중심적 계기이자 주체권을 신비화하고 파괴하는 중심적 계기로서 포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5]저는 미국이 전지구적 권력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단지 다른 개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미국 권력 자체가 그것과 다른 경제적, 정치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대화를 그리고/혹은 각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9.11 테러리스트 공격은 제국의 구성에서 구조적으로 대의되기를 의도하는 힘들 사이에 개시된 내전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 주지하듯이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은 많은 부문 핵무기 사용의 불가능성에 의해 중화됩니다. (...) 화폐의 관점에서 미국은 금융시장에서 점점 더 위험에 노출되고 있으며 취약해지고 있습니다. (...) 요컨대 필시 미국은 곧 제국주의적이기를 그만두도록, 그리고 자신이 제국 안에 있음을 인식하도록 강제될 것입니다.

[37]우리의 정치적 문제는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투쟁들에 적절한 공간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 저는 국민국가가 거짓되고 유해한 이데올로기보다 덜한 어떤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와 달리 운동들이 운동의 네트워크들은 세계에서 자유롭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다극적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교차하며 그리하여 어려움 없이 통합된 운동을 구축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구축해왔습니다. 이러한 통합과 그에 뒤따르는 공통의 목표들의 인정을 방해하는 모든 시도는 반동적입니다.

[R-Commentary]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네그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상황이며 가장 초보적인 맑시즘인 것으로 보인다.

[41]저 역시 국민국가가 사라지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제게 이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또한 제게 명백해 보이는 것은, 보편적 지배 기능 및 내적 공공질서가 (그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각 국민국가에 특화되어 구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많은 기능들이 존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국민국가가 경향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그것이 직접적으로 더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 [국민국가는][42]제국의 위계화 및 특화과정들 안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R-Commentary] 제국이라는 전체 자본주의기계 안에 국민국가는 하나의 중요한 지절이자 부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의 직접적인 역할은 점점 제국적 명령의 연결체계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것을 강제력을 통해, 또는 기만과 사기, 이데올로기 조작을 통해 원활히 하는 데 봉사하게 된다.

[42]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전지구적 탈안정화의 시나리오를 개시하기 위해서 제국의 지[43]점들 중 어떤 하나에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구도에서만 지배규칙과 착취 규칙의 변형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45]윤리적, 정치적 관점에서 혁명을 사유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또 심오한 인류학적 변형, 즉 인구의 지속적인 혼종과, 몸의 삶정치적 변형이라는 관점에서도 혁명을 사유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투쟁의 첫 번째 영역은 지구의 모든 표면에서 이동하고, 일하고 배울 보편적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혁명은 제국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을 통해서도 있습니다. 혁명은 있을 것 같지 않은 동궁(冬宮)(여기에는 백악관을 폭격하고자 했던 반제국주의자들이 있을 뿐입니다)에 맞서서 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모든 중심적, 주변적 구조들에 맞서서 그 구조들을 빈껍데기로 만들고 또 자본으로부터 생산력을 빼내는 데까지 확장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R-Commentary] 제국의 모든 지점이 약한 고리일 수 있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제국은 항상적인 내전상태로 공포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의 가장 극악한 한계에까지 다중을 밀어붙일 것이다. 다중은 이 한계지점에서, 이 심리적, 물질적 마지노선에서 퇴각하지도, 무모하게 스스로를 던지지 않는다. 다만 엉덩이를 까보이고, 모욕한 후, 탈주한다. 유쾌하게.

[47]다중은 어떤 의미에서도 대의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특이성의 다양체입니다. 반면 ‘민중’은 근대국가가 정당화라는 허구의 토대로서 필요로 하는 인위적 통일체입니다. 다른 한편 ‘대중’은 현실주의 사회학이 (자유주의적 형태의 자본 관리에서든 사회주의적 형태의 자본 관리에서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바탕에 설정하는 개념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무차별적인 통일체입니다. 이 두 경우와 달리 우리에게 인류는 특이성, 특이성들로 이루어진 다중입니다. (...) [다중을] ‘계급’과 대립시킨다는 사실 (...) 노동자는 점점 더 비물질적인 생산력의 담지자로 나타납니다. 노동자가 노동도구를 스스로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비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에서 도구는 두뇌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도구에 대한 헤겔적 변증법도 종식되는 것입니다.) 노동의 이러한 특이한 능력이 노동자를 계급보다는 다중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48]우리는 다중을 독특한 정치적 활력으로 정의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범주가 통일성을 전제함으로써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분석함으로써 식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1]저는 왜 세계 전역의 많은 인구의 이주와 희망 탐색이 ‘프로메테우스적 보편주의’로 조소되어야만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주가 단지 빈곤을 피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들이 자유, 지식, 부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은 구축적 활력이며 특히 그것이 가난에 근거할수록 더 강력해집니다. 사실 가난은 단순한 빈곤이 아니라, 욕망이 지시하고 노동이 생산하는, 대단히 많은 것들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이주자는 진리, 생산, 행복을 찾는 사람의 존엄을 갖고 있습니다. (...) 세계는 정말이지 유목주의와 혼[52]종화에 의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R-Commentary] 국내적, 국제적 ‘이주’는 가난에 떠밀려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주’는 불행과 슬픔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실현과 새로운 세계와의 소통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하는 하나의 기획이다. 비록 여전히 정착적 습관이 그러한 사유를 방해하지만 말이다.

1부

강의1 역사적 방법에 대하여 : 인과성과 시기구분

[58]자본 개념은 사회적 관계의 개념입니다. 그런 한에서 이러한 관계는, (...) 자본주의 명령능력이 재생산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규제되어야만 합니다. (...) 이제 다름 아닌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주권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도록 강제하는 첫 번째 단절이 일어납니다. 이 단절은 1968년 이후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1971년에서 1973년 사이에 정의됩니다. 이 시기에는 달러의 고정환율제 즉 달러-금 등가제가 종식되고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났으며 핵무기제한에 관한 협정(1972년 ABM 협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바로 일국적인 주권적 규제 기구를 통해서만 자본주의 발전을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굳어진 순간, 즉 개별 국가의 공간 [59]안에서 자본관계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굳어진 순간이었습니다. (...) 이 국면에서 [연대기적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초국적 명령 형태들이 출현했습니다. (...)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면서 (...) 자본주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일련의 기구들(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이 발전을 통제하는 일반적 기구들로 변형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라 불리는) 미국의 힘의 투사일 뿐만 아니라, 초국적 균형점이자 세계적 규모의 발전의 규제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R-Commentary] 이 초국적 명령형태들은 삶정치의 맥락에까지 침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체를 변형시키고, 정신의 지향성을 규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물음: 정치적 변동의 과정에서 신체는 어떻게 감응하는가?

[인과성에 대한 인식:] 새로운 상황을 특징짓는 두 번째 요소는 자본주의 발전의 제국주의 국면이 종식된 것 (...)입니다. 이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일어났으며 명백하게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

[60]최종적 요소는 제2세계의 종식, 즉 ‘현실 사회주의’ 혹은 실현된 사회주의 세계의 종식입니다. (...) [61]러시아 국민국가의 공간에서 그리고 소비에트 제국주의 체제의 공간에서 주권을 위기에 빠뜨린 것은 자유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요구된 것은 물질적이며 삶정치적인 자유였습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그리고 장벽을 우회하면서 생산자 대중을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끈 저 노동 탈주의 에피소드, 유목주의의 에피소드 (...) 이 경우 전제정치를 타도한 것은 이동성이었습니다.

[R-Commentary] 위기와 건설의 두 계기는 그래서 항상 외부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주체를 포함하는 단일한 내부의 ‘운동’이다. 이 내부의 외부. 잔여의 힘 또는 내파와 건설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토포스.

그러므로 우리는 (...) 그것이 자본주의적 명령 안에서 자본주의적 명령에 대항하여 역사를 만든 투쟁이며, 특히 국민국가의 통제 공간을 폭파시키고 제국의 구성을 추동한 투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61]『자본론』에서 노동계급 개념은 노동력 개념의 정치적 정련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노동력은 가변자본이라는 경제학적 개념의 사회적 형상입니다. 따라서 노동력과 가변자본은 자본 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 [62]맑스주의 전통에서 노동계급 운동을 자본 관계의 독립변수로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저 맑스의 해석을 전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계급이 투쟁을 통해 모든 발전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노동계급은 그 주체적 존재에 의해서 스스로를 사건으로 드러내는 능력에 의해서, 스스로를 사회적 구성으로 배치하는 능력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R-Commentary] 노동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신체를 지탱하는 잠재적 활력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주체화’로 견인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어떤 폭력적 전일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다중’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항상 ‘잠재성’으로, 긍정적 생의 약동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

[64]더 이상 부정적으로가 아니라 구성적으로, 그러므로 주체가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 움직일 때 전진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 대한 심화된 정의를 발전시켜야만 합니다. (...) [65]역사적 발전 일반은, 인과적 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미리 주저지지 않으며 언제나 과정 안의 주체의 행위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주체의 행위-만약 그것이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연결된다면-는 언제나 측정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척도의 외부’에 있다는 의미의 그리고 또 ‘척도 너머’에 있다는 의미의 측정불가능함입니다. (...)

사실 가치 개념이 가치법칙으로 표현될 때, 이는 그것이 노동 규정에 척도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제안하는, 자본 관계에 대한 닫힌 파악으로부터 적대[66]에 기반을 둔 열린 파악으로의 이행은 노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모든 생산과정과 모든 투쟁 과정의 핵심에서 확증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치척도가 제거되며 발전의 균형이라는 기존의 관념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

[R-Commentary] 법칙에서 적대로의 이행. 자본론에 대한 정치적 해석(해리 클리버). 명령의 특수한 국면에서 노동의 전면화. 네그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봤을 때, 헤겔의 몰락이며 스피노자의 새로운 발견이다.

가치법칙에 대한 논의-이는 맑스와 고전경제학에 전형적인 것입니다-자체가 노동조직화의 특수한 국면과 결부되는데, 그 국면에서는 노동이 실제로, 고전경제학 이론이 예견했듯이, 노동시간이라는 단위로 측정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치화 과정은 노동의 사회화를 통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되며, 역사적 인과성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시기의 맥락에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72]맑스는, 자본의 국가를 세계 시장의 통제 구도 안에 배치시켜야 하는 만큼, 자본의 국가에 대해 말할 때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맑스는 자본의 국가를 국민국가로 파악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맑스는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도식을 필요로 했는데, 그에게 이 일반적 도식은 전지구적 수준에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맑스는 국민국가를 자본주의 발전의 장애로 간주했으며, (시초축적의 어마어마한 지렛대였던 경우에는)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잔존물로 간주했습니다.

[R-Commentary] 그래서 맑스에게 ‘국가론’은 그의 한계가 아니라 ‘여지’ 또는 ‘잔여’인 것이다.

[75]실질적 포섭은 사회적인 것의 자본화를 의미합니다. 결국 착취의 중심이 직접적으로 사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가치법칙의 위기는, 그리고 그에 따른 (...) 착취와 수탈의 탈측정화는 명령의 직접성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 명령은 착취 과정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어떤 것이 더 이상 아니며, 착취 과정을 직접적으로 조직하는 어떤 것입니다. (...) 우리는 주권개념과 자본 개념 사이의 일종의 임계적 동일성을, 혹은 적어도 일종의 심오한 상동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R-Commentary] 이 명령의 최종 목적은 명령을 다중에게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명령’이라는 개념을 단순한 군사적이고 위계적인 의미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푸코적이 개념사 안에서 ‘명령’은 훈육과 더불어 존재하며, 또한 삶권력의 작동 방식이며 삶정치의 활력 속에 기생하는 ‘스위치’와 같다. 이것은 외생적이기를 그치는 순간, 특히 다중의 신체 안에서 자동화되는 순간, 스스로를 은폐하고 물러난다. 그래서 이 명령은 자주 ‘국가캠페인’이나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금연캠페인’과 ‘학교 상벌제’ 같은 것을 보라. 이것은 과거의 방식보다 훨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중이 항상 감시를 내면화하도록 작동하며, 그것이 완전히 무의식화되는 순간 작동을 멈춘다. 다중의 삶이 포섭되는 그 순간 말이다. 이때 다중의 사회적 신체는 텅 빈 환등기처럼 ‘구조’와 그것의 ‘본질’을 비출 뿐이다. 다중은 이때 서로 간에 ‘구경꾼’이거나 순간순간 역할을 바꾸는 ‘죄수-간수’가 된다.

[77]자본주의의 시간성은 스스로를 불연속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구성적으로 되며, 불시성(untimeliness)은 주체성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실질적 포섭에 대해 앞서 이루어진 논의와 축적관계의 사회화에 대해 앞서 이루어진 논의 사이에는 명백히 크나큰 유사성이 있는데, 이 축적관계는 사회적으로 되면서 말하자면 주체화됩니다. 이렇듯 생산적 시간의 불연속성에서 존재론적 이행이 결정되며, 구성된 존재는 언제나 새로 구성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보 론

주권

제한된 주권과 9.11

[79]그것[9.11 테러]은 실체론적 주권개념이 부적절함을 드러냈다. 주권은 자립적인 실체가 아니며 오히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관계이다. 주권적 권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80]은 끊임없이 피지배자에 대한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고 재생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복종하는 자가 명령하는 자만큼이나 주권의 기능과 주권의 이념 자체에서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실체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식의 주권의 배타적 원천은 존재하지 않는다.

[R-Commentary] 관계론적 실체개념으로 ‘주권’을 이해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실체를 양태들의 상호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실체의 표현으로서 양태들의 활력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이론적 전략이기도 하다.

(...) 미국 정부는 주권의 자립적 원천이 아니라 주권의 현재 형태를 정의하는 전지구적 관계들의 체제에 통합되어 있음을 9.11이 결정적으로 보여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램분자적 역사와 분자적 역사

[81]냉전 시기 동안 일어난 주권의 변형은 그 과정을 그램분자적 관점에서 보는지 아니면, 분자적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대단히 상이하게 드러난다.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차이는 단순히 규모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며, 또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의 차이와 관련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 [이 두] 용어는 모두 사회적 집단을 가리킨다. (...) 그램분자적인 것은 통합과 대의의 과정을 통해 응집되고 통일된 총체를 구성하는 [82]거대한 집성체 혹은 통계적 집단과 관련된다. 반면 분자적인 것은 동질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 성좌 혹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미시다양체들 혹은 더 정확하게는 특이성들을 가리킨다. (...)

그램분자적 관점에 따르면 냉전 기간은 초강대국의 주권 이외의 모드 주권들을 박[83]탈하는 (결코 완전하거나 절대적이었던 것은 아닌) 경향을 함축하는 것이다.

주권의 모순들

[87]이제 주권의 절대적 통제의 모든 측면이 균형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군사권력은 언젠가는 시합에 참여하도록 상대방을 초빙해야만 한다. 조만간 국제상관습법은 자신의 보증인에게 구원을 요청해야만 하는데, 이는 국가(와 다중)를 경기에 참여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 어떤 지배형태와 독재 형태도 언어를 통제하면서 동시에 언어적 생산을 장려할 수가 더욱더 없는데, 이는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각의 측면과 관련하여 제국은 자신의 내적인 한계와 이중적 본성을 인정하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R-Commentary] 제국의 한계는 제국 자체라는 것. 제국은 자기자신을 지양함으로써만 스스로를 극복한다는 이 논리. 변증법이다! 과연 네그리는 변증법을 극복한 것일까? 네그리 정치철학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대로 보충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에 ‘일의성’이 필요하다. 과연 자율주의의 일의성은 무엇인가? 또는 누구인가?

내전

몇몇 고고학적 전통들

[90]오늘날 주권의 위기는 심각하며 심대하다. 왕은 진정 벌거벗었다. 주권은 단지 무용한 지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금융력, 언어력을 독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주권을 절대적 권력으로 변형하려는 기획은 [91]환상이다. 그리고 이는 비극적 망상으로 끝날 수 있다.

주권과 전쟁

[92]지구화가 바람직한 것일 수 있으며, 혁명 과정에 상응할 수 있고 그것의 일부일 수 있다 (...) 근대시기의 혁명 과정에는, 지구의 지배적 국가들에서의 노동계급의 봉기와 스스로 계급이기를 거부하는 그들의 욕망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식민지 민중의 해방 투쟁과 국민이기를 거부하는 그들의 욕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지구화의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욕망이 주권의 실제적 가능성을 파괴할 수 있다. 이 욕망은 제국적 지배를 파열시키는 내전에서 발현된다.

[R-Commentary] 맑스주의의 비밀. 적어도 한 세대 전체를 앞서가기, 비록 그 시대 안에 잔혹함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이것이 맑스의 마키아벨리즘일까?

(...)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영속적인 전쟁의 억압적 상태를, 진정한 사회적 평화를 해방전쟁으로 변형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다중에 걸맞은 기획인 것이다.

2부

강의2 사회적 존재론에 대하여 : 물질노동, 비물질노동, 삶정치

[98]우리는 비물질노동의 존재론, 혹은 더 정확하게는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비물질적 존재의 존재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비물질노동은 주체들과 사회운동들에 의해서 표현되는 (그리하여 그들이 생산에 이르게 되는) 지적, 소통적, 관계적, 정동적 활동의 총체로 간주됩니다.

(...) 이러한 가설의 토대는 맑스의 소위 ‘기계에 관한 단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99]우리는 한편에서는 노동시간이 다른 한편에서는 이 시간의 척도(그리하여 가치법칙)가 생산의 중심적, 계량적 요소로서 점점 덜 중요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적, 집단적 개인이 생산가치를 규정하는데, 이는 노동이 소통적, 언어적 형태로 조직되고 지식이 협동적인 어떤 것인 상황에서는 생산이 지적, 언어적 노동을 구성하는 연관들 및 관계들의 통합성에 (즉 이러한 집단적 개인에) 점점 더 의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R-Commentary] 분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주체성이라기보다 개체성에 가까운 이것임(whatness).

[101]사실 거대한 위기는 우리가 소위 ‘도구의 변증법의 종식’을 목격한다는 사실에 달려 있는데, 여기서 도구성은 자본이 노동자에게 노동 도구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뇌가 노동도구를 재전유할 때, 자본은 도구에 대한 명령을 구현할 가능성을 더 이상 갖지 못합니다. (...) 도구의 변증법이 존재하는 한 자본은 생산과 재생산에서 개인을 훈육하거나 인구를 통제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의 패러다임 전체가 [102]변화될 때, 노동이 대중지성에 의해서 생산에 투입되는 지식 전체를 구성할 때, 정치적 통제는 전쟁을 통해서 행사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그리고 오직 전쟁만이 기생적 자본에 의해서 행사되는 통제형태입니다. 전쟁이 바로 자본주의적 질서의 장치가 되는 위기인 것입니다.

[R-Commentary] 좀 더 논의를 진행시켜보자. 전쟁을 통해 자본은 노동을 통제하는데, 이때 ‘내면화’ 그리고 ‘검열’은 중요한 기제가 된다. 내면화되는 것은 ‘공포’와 ‘불안’이며, 그 경로는 ‘신체’를 통해서다. 검열은 내면화될수록 더 작동한다. 하지만 내면화된 검열은 두뇌의 생산적 특질에 질곡이 되는데, 이것이 위기, 즉 이윤의 위기로 발전한다. 한편으로 이 위기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인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어떤 매개도 없이 폭력적인 성격을 띄게 되며, 그 저항의 성격도 폭력적일 수 있다. 이 폭력이 계급 내부로 향할 때 두뇌는 폭파하여 자학이나 자살로 이어지고, 외부로 향할 때 ‘테러리즘’이 된다. 이럴 경우 오직 ‘공통성’에 의한, ‘감성의 정치’를 통한 조절기제만이 노동을 본연의 가치로 이끌어 갈 수 있으며, 테러리즘의 샛길을 피해 진정한 혁명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현재 이 조절기제는 가상공간이거나, 또는 현실 공간에서의 ‘문화’다.

(...) 여기서 명령기능은 정보를 봉쇄하는 위협으로, 인지적 과정에 대한 훼방으로 조직됩니다. 요컨대 기생적 자본은 특히 지식, 협동, 언어의 운동을 정지시킴으로써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인 것입니다. 자본가는 살고 또 재생산하기 위하여 매번 사회에 공갈을 칠 수밖에 없고, 사회적 생산과정이 명령을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마다 그 과정을 봉쇄할 수밖에 없습니다.

[R-Commentary] 내 생각에 이 ‘초과’는 존재론적으로 ‘잔여’에 기반한다.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을 잇는 공감/공통 능력, 그것이 ‘잔여’다.

[106]우리는 방법을 지식의 관점에서 즉각 산 노동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유래하는 생산과정은 지성이 모든 생산에 제안하는 긍정적 혼종화에 열려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방법은 언제나 노동의 변형을 그 각각의 형태에서 안으로부터 뒤따를 것입니다.

[107]자본이 삶 전체를 점령했다고 말하는 식으로 외부로부터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도달합니다. 삶 전체를 점령한 것은 노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 [108]물질노동과 비물질 노동의 혼종화 (...) 전자는 조금씩 발전하면서 후자의 안으로 끌려들어갑니다. 즉 물질노동은 자신을 변형하면서 점점 더 지적, 비물질적 노동의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113]삶권력은 권력의 거대한 구조와 기능을 지칭하는데 쓰이며, 반대로 삶정치적 맥락 혹은 삶정치는 권력 관계, 권력 투쟁, 권력 산출이 전개되는 공간을 가리키는 데 쓰입니다. (...) 저항의 복합체에 대해 생각할 때, 권력의 사회적 장치들이 충돌하는 경우들 및 그 정도에 대해 생각할 때 삶정치 혹은 삶정치적 맥락을 말합니다. (...) 요컨대 이러한 공간에서 차이들은 흩어져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정치를 말할 때에 무엇보다도 우리는 강력하게 구성된 교직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삶정치는 계급투쟁의 확장입니다.

[R-Commentary] 프랙탈 차원의 교직물. 그것은 0차원 이하에서부터 n차원에까지 나아갈 것이다. 이 교직물을 삶권력은 결코 완전히 포획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언제는 ‘초과되는 잔여’가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잔여로서의 초과’이지 ‘초과로서의 잔여’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115]제국에 대한 우리의 최초의 삶정치적 인식은 노동의 이동성, 거대한 이주과정, 거대한 삶정치적 운동의 발전 위에 뿌리를 두고 있[116]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빈곤 혹은 폭정으로부터의 탈주를 나타내는 것만도 아니고, 자유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면서 움직이는 운동, 부, 고용, 발명을 향한 운동, 비물질노동의 중심성을 향한 운동, 이러한 회로들로 들어가려는 거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116]착취 기능이 협동능력과 가치 창조 능력 이외에 호흡, 공간, 운동 또한 제거하는 것이라면, 빈자는 배제된 자일뿐만 아니라 또 착취의 전형적인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빈자와 노동자는 함께 투쟁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해 빈자는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산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 내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부, 배제, 가난의 장소인 이러한 비장소는 그 자체가 저항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기본적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으로부터의 엑소더스의 핵심은 바로 노동[117]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권력을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 있습니다.

지구화와 민주주의

[121]너무도 자주 이러한 주장은 양자택일로서, 즉 국민국가가 여전히 중요하다든가 아니면 새로운 지구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사실 양자가 모두 옳다. 지구화 시대는 국민국가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는다.

(...)[122]우리는 국민국가의 기능과 권위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국민국가의 주요한 기능-통화유통, [123]경제의 흐름, 이주, 법규범, 문화적 가치 등에 대한 규제-이 그 중요성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의 지구화 과정을 통해 변형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발본적인 질적 변화는 주권과 관련하여 인식될 수 있다. 국민국가는 근대시기에 맡았던 최종적인 주권적 권위의 역할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다. 이제 제국이 최고의 권위로서 국민국가 위에 군림하며, 사실상 주권의 새로운 형태를 구성하는 것이다.

3부

강의3 정치적 주체 : 다중과 구성권력 사이에서

보 론 다중의 존재론적 정의(定義)를 위하여

4부

강의4 주체성의 생산에 대하여:전쟁과 민주주의 사이에서

보론1 대항권력 203

보론2 「무엇을 할 것인가?」로 오늘날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일반지성의 신체

5부

강의5 논리학, 탐구의 이론 : 주체 및 에피스테메로서의 전투적 실천

보 론 맑스의 발자취

옮긴이 후기

주요 용어 대조표

인명 찾아보기

용어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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