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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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암시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을 뜻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 있다시피, 들뢰즈에 의해 충분히 익은 현대철학의 사유의 특질은 표상을 가두고, 위계화하면서 닦달하는(Heidegger) 근대적, 더 거슬러 가 플라톤적 사유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항이며, 전복이다.

혁명적 사유. 그것은 후설 이래, 무전제의 철학을 구성하기를 갈망한 현대철학이 필연적으로 입지할 수밖에 없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그러나, 그 일반적인 형태가 가지는 통속화 경향은 마치 후설이 빠졌던 그 '순수 자아'의 함정과 같이 많은 철학자들에게 타성으로의 회귀를 강요하는 듯 보였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같다. 그것을 힘써 차근차근 풀려고 하는 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은 들뢰즈에 와서야 가능했다. 들뢰즈 사유의 전거로서 니체와 프로이트는 철학적 도제수업에서의 가능한 최대치의 날카로움을 들뢰즈에게 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설의 유년시절을 지배했던 그 '날카로움'이라는 메타포(p. 84)는 들뢰즈에게도 합당하다. 사유는 갈고 갈아서 마침내 형체조차 없어졌을 때 그 자신의 전제를 단숨에 잘라 버릴 수 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표상'과 '동일성'이라는 철학의 가능 근거를 단지 그 반대로 사유하기 시작하는 실험적 주체에게서 극복 가능한 것이다.

혁명적 사유. 서동욱 교수가 들뢰즈와 함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국가, 혈통, 가문, 종파, 계급, 학연, 지연, 통념이 지배하는 변화를 싫어하는 정주민의 땅 안에서 내 후손이 차지할 유리한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후손들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거친 광풍이 몰아치는 유목민의 유랑길에, 아무런 공리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유에 가해지는 폭력 앞에 내몰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무전제로부터 발생하는 사유란 언제나 새로운 법칙과 가치의 창조라는 과제 앞에서 격렬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을 가진 카인이 짐승을 몰고 떠돌아다니는 아벨에게 그랬듯 숙명처럼 정주민들은 언제나 이 유목민들을 죽이고 싶어할 것이다(p. 91). 

공리 없는 사유의 유랑길, 혁명과 카인의 복수. 서동욱 교수와 들뢰즈는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유 자신이 충족 이유인 그런 형이상학이 아니라, 문화적 사유, '비표상적 사유'다.

이 책에서는 그래서, 들뢰즈를 중심으로 레비나스, 칸트, 하이데거, 니체, 사르트르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들뢰즈에게 어떤 특권적 지위를 선뜻 선사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그랬듯이 저자는 들뢰즈까지 포함하여, 이 많은 철학자들을 자신의 사유의 경계 내에서 비판적으로(그러나, '긍정'적으로) 사유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거대한 사유자들 사이에 어떤 유비적인 연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횡단선을 내고, 그럼으로써 사유가 돌파해 갈 수 있는 현대적 첨단에 내기를 건다.

인식에 있어서 무전제성, 주체와 타자, 혁명과 반동. 이런 테제들이 신중하게, 그러나 강력하고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것은 어쩌면,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가지고 있는 책의 이중적 구조(본문과 주석이라는)를 저자가 본받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사르트르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다. 서동욱 교수는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타자'가 곧장 사르트르의 그것에 빚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정확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사르트르의 예언자적 풍모를 드러내 보이는 부분은 읽는 사람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함께 있는 존재 l'etre-avec(Mitsein)'는 한 개별자와 다른 한 개별자와의 얼굴을 마주한 en face de 명석판명한 위치가 아니다. [……] 그것은 자기의 동료와  팀워크를 같이 하는 막연한 공동 존재이다"(285). 여기서 "우리들의 관계는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옆으로부터의 par cot  상호 의존이다"(284). 이러한 사르트르의 주장을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문자 그대로 반복한다. "하이데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로 설정한다. [……] 하이데거에 있어서 타자는 함께 나란히 있음 Miteinandersein이라는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 함께 mit라는 전치사가 여기서 관계를 묘사한다. [……] 그런데 타자와의 근원적인 관계는 함께 mit라는 전치사를 통해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TA, 18-19)(p. 170).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인식적 소유물인 표상이 아니며(291), 타자를 표상으로 세울 경우 타자성은 그 표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273)고 말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입을 통해 우리 시대의 주요 명제들이 출현하기 훤씬 이전에, 들뢰즈와 푸코의 저작들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리고 레비나스가 겨우 후설에 관한 연구서를 하나 출간했을 즈음, 사르트르는 이미 우리 시대 철학의 이 모든 주요 주제를 예언하는 성찰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서양 철학에서 줄곧 동일자는 표상을 매개로 타자를 자시의 지평 위에 귀속시켜 왔으며, 동일자의 인식적 지평 위에서 타자가 대상으로 정립될 때, 그 타자의 타자성을 증발해 버린다는 성찰에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 훨씬 앞서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p. 171).

타자에 대한 사유가 유래하는 계보를 파헤치는 저자의 날카로움은, 이 책이 목표로 삼은 들뢰즈의 '차이'와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유사성과 이질성을 밝혀 내는 부분에서도 그 성과를 발휘한다.

예술이 비인격적 익명성을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쌍둥이보다도 더 경이롭게 서로를 닮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의 비인격적 익명성으로부터 한 사람은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저항, 혁명이라는 자유의 사건을 목격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책임성으로부터의 자유, 곧 비윤리적인 혼돈을 목격한다. … 주체 개념으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들뢰즈에게, 비인격적 익명성을 실현해 주는 예술은, 우리 사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혁명을 의미하지만, 레비나스의 경우 예술의 비인격적 익명성으로 인한 주체의 사라짐은 곧 책임성의 실종을 의미한다. 아마도 두 사람의 화해 불가능성은 근본적으로는 '이편'의 철학(들뢰즈의 내재성의 철학)과 '저편'의 철학(레비나스의 초월의 철학) 사이의 차이에서 유래할 것이다(p. 394).

이 즈음에서 우리는 그렇다면, 저자는 들뢰즈와 레비나스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저자는 둘의 차이에 어떤 횡단선을 내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둘의 차이란 그리 큰 단절을 뜻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체의 소각과 함께, 또한 '대타자(오이디푸스)'의 소멸과 함께, 우리는 타자를 발견하고 주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면서, 68년 혁명의 그 도발성과 같은 또 다른 혁명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들뢰즈와 레비나스는 혁명적 사유의 가파른 샛길에서 조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차이와 타자'라기 보다, 차라리 '차이냐? 타자냐?'인가? 그건 저자가 밝히고 있지 않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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