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자유 - 길의사상총서 3, 현대철학의 쟁점들
엄정식 / 길(도서출판)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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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식 교수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단순 명료하다. 철학이 사유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인식을 가능케한다면, 그 사유는 "깊이 생각하여 자기 엄지손가락을 보고도 온 우주의 신비를 실감할 수 있는 재능"(25)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능은 실로 자유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철학은 현실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견지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의 이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는 식의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철학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모습은 엄정식 교수가 이 책의 한 챕터를 할애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칼 포퍼와 신합리주의(neo-rationalism)의 철학에 대한 이해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자유'를 향유할 자아(또는 주체)가 현대사회에는 모호한 채로 부유하고 있다. 그것은 많은 면에서 매체와 관련되어 있으며, 간접적으로 영미 분석철학적 전통이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되는 아포리이기도 하다.

"대중사회에서는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환경이 극도로 확대되어 의사환경을 조장하고 여기서 자아의 정립과정에 사이비적 요소가 개입되어 의사자아 pseudo-self 를 형성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67).

"이러한 철학관을 가지고 실증주의적 분석철학자들은 현상을 논리언어의 틀을 통해서 바라보고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정보처리의 체계를 정립하는 데 적극적인 구실을 함으로써 컴퓨터의 발달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했음은 물론, 정보사회를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303).

실증주의적 분석철학이 가지고 있는 혐의는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이 존재를 '어법적' 대상으로 보기 시작할 때부터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재에 대한 소박한 반영론은 현대분석철학에서 설 자리가 없다. 실재에 대해 완벽하게 객관적인 이론적 모델을 제공하던 '과학'도 쿤의 범례(paradigm)'에 의해 역사적 대상으로 평가절하된 상황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이 엄정식 교수와 그가 많이 인용하는 철학자들의 단편들에 의하면 바로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다. 현대철학의 병리적 징후라고도 할 만한 이 두 의뭉스런 탕아들은 자아 정체성을 교란하고, 철학을 단지 비평적 작업 속에 가두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자유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상황에 대해 엄정식 교수는 (그 스스로가 진보적 진영의 한 부류로 규정하지만) 벼리가 보기에 다소 보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 상황에 대한 현대철학의 처방를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엄정식 교수의 분류를 살펴 보도록 하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반응을 목격하게 되는데, 하나는 그 문제 자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보수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신속하게 대처하려는 진보적인 반응이다. 보수적인 반응에도 두 가지 양상을 추적해볼 수 있는데, 하는는 복고적인 경향을 나타내며 전통과 밀착된 관계 속에서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수행되고 있는 방법에 따라 해결의 방안을 계속 다른 문제와의 연계 속에서 모색하는 방식이다. 한편 진보적인 반응에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와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로 나누어서 고찰해볼 수 있다. 전자는 전통과의 연계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반면에 후자는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경향으로 보인다"(28).

밑그림을 작성한 후 엄정식 교수는 보수진영의 첫째부류로 신토마스 학파와 신아리스토텔레스 학파(마리탱 J. Maritain, 슈패만 R. Spaeman, 코플스톤 F. Copleston, 로너건 J. F. Lonergan)를 지목하고, 두 번째 부류로는 신자연주의 학파(콰인, 셀라스, 골드만 A. Glodman, 김재권, 하크 S. Haak, 아우디 R. Audi)를 지목한다. 그리고, 진보진영의 첫째부류로 신칸트학파적 비판철학자들(포퍼, 아펠, 하버마스, 롤스, 데이비슨, 퍼트남, 그리고 벼리가 보기에 엄정식)을 꼽으며, 둘째 부류로 탈현대주의(post-modernism) 학파(데리다, 푸코, 리오타르, 로티)를 지목하고 있다.

엄정식 교수가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시피, 철학의 현대적 상황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은 진보진영의 첫번째 부류가 가지고 있는 온건한 합리성의 회복에 그 관건이 놓여 있다. 그가 보기에 보수진영은 어떠한 상황적 해결책이 아니라, 복고적인 고착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급진주의자들"(29)로서의 데리다 등은 너무 쉽게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며, 자칫 경박해지기 쉬운 것으로 비춰진다.

우리는 엄정식 교수가 지목하는 롤스와 포퍼등이 가지고 있는 정치철학적 보수성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이것은 엄정식 교수가 의도하지 않았던 바, 일견 독서의 역설적인 성과일 것이다. 또는, 관점의 차이일 것인데, 그가 이 책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우리가 보기에 단지 고전으로의 회귀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것에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 보수/진보의 분할 선상에 바로 칸트가 있다.

"현대철학은 칸트의 비판철학에 대한 수정과 반발과 극복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종교적 정신의 세계와 과학적 물질의 세계를 양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존재론적으로는 '본체 noumena'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는 '선험성 apriori'라는 부담스로운 유산을 남겼다. 헤겔에 의해서 고무된 현대철학자들은 대체로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여 이 문제에 대처하였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실존현상학은 칸트의 구성주의를 극복할 수 없었고 프레게와 러셀의 분석철학도 현상의 역설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맑스와 듀이의 실천철학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구분한 칸트의 이분법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칸트의 비판철학을 가능하게 했던 두 가지 요소, 즉 전통적인 언어관과 과학관은 오늘날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리성과 합리성과 확실성을 확보했던 언어의 지칭설과 과학의 객관성이 흔들리자 우리는 새삼스럽게 철학의 행방을 문제삼고 그 정체성의 확보에 급급하게 된 것이다"(28)

다시 말해, 칸트가 남겨 놓은 유산은 해결되지 않았으나, 그 유산의 전제가 되었던 합리성과 객관성이 매우 불안정한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여기서, 엄정식 교수에게 칸트 철학의 엄격성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3부에서 보이는 칸트로의 회귀는 칸트철학의 한계를 돌파하는 시도로서의 어떤 급진적인 플랜도 실패할 것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실질적인 대안은 바로 엄정식 교수가 지목한 신합리주의자들(엄정식 교수의 용어)에 있다. 이들은 현대철학의 견결한 Kantian들이다. 이성의 합리성(rationality)에 대한 신뢰와 함께, 그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며, 실천철학의 초월적, 정언적 성격 또한 인정하는 것이 Kantian들의 기본 덕목이다. 이 지점에서 신합리주의는 대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맑시즘을 비롯한 좌파 정치철학과 대립하게 된다.

벼리는 엄정식 교수의 온건한 정치철학과 칸트로의 경도를 신중한 현실적 철학의 한 발로라고 보고 싶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토록 찾고자 하는 '자아'와 '자유'가 과연 그러한 온건성을 통해 획득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칸트의 자아는 통각적 능력을 지닌 하나의 단일한 구성적 실체가 아닐까? 우리는 이러한 실체적 자아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력한 비판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단지 비판적 언급의 맥락에서만 등장하는 소위 급진주의자들에 대한 신중한 관심이 또한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그저 경박한 시류나 유행으로 치부하기에는 그들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며 또 지속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맑스가 제시한 자유의 영역은 또 어떤가? 그러나, 이 책에서 그런 논구를 찾아 보기는 힘든 것 같다.

우리는 이 책의 말미에 엄정식 교수가 열어 놓은 어떤 가능성을 읽어 보는 것으로 그러한 또다른 '자유'의 일단을 긍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칸트의 초월적이고 비판적인 철학을 극복하기 위하여 헤겔과 니체가 나타났듯이 아마 곧 이와 유사한 철학자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로티는스스로 헤겔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고 데리다를 비롯한 탈근대주의자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니체의 후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들이 헤겔이나 니체로 돌아갈 수도 없고 또 돌아가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언어적 전회'란 지성사적 사건이 있었고 새로운 과학관으로 무장한 분석철학이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아직 칸트는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는 한 당분간 현대인의 삶은 계속 이진법으로 디지탈화한 정보의 배를 타고 실용주의와 신비주의 사이를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아의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 있지 않으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의 개념도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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