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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도 생각이 정리가 안된다. 책의 내용과 관련해서도 그렇지만, 일단 마지막에 읽은 "작가의 글"과 관련해서 [장애학교 이사장 가족과 측근(?)들]이 다년간에 걸친 수 많은 성폭행에도 불구하고 기소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는 기사를 보고, 그 동안 쓰던 글을 당장에 접고 일단 이 내용부터 글로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 공지영의 능력과 실행력이 부럽다. 작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론화 시켜줄 수 있으니까. 물론 속에 있는 생각과 마음 등을 정리해서 써 내려가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겠지만_
그리고 "어른이 되면 잊어간다는 질문" 부분을 읽는데 내가 잊어버린 질문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세상이 나를 바꾸는 것을 막고 싶다. 뭐 이런 거창한 생각을 해오던 나는 아니었지만, 가끔 '이건 아닌데.' 싶은 상황에서도 내 안에서 '정의'라고 외치는 걸 행동하지 못하는 실천력이 부끄럽다 .
일례로 '시국선언'에 대해 서명을 한 교사들의 명단을 전교조에서 공개하면서, 서명한 교사들의 안위(?)를 위해 소속을 밝히지 않자, 정부에서 동명이인이 소속된 모든 학교에 공문을 보내서 서명을 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를 서명확인 받으라고 했다며
출근하라는 학교의 연락을 받았을 때...
물론 내가 한 것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란 다른 교사는 본인이 시국이라 생각을 해서 서명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분명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본인의 자유가 보장된 일일 것이다. 그것이 누군지 색출해 내려고 전국의 모든 '○○○'이란 이름을 가진 교사들에게 서명 여부를 확인하려는 서명을 받는 그들보다 왜 내가 '안했다는 서명'을 당신들에게 해야 하냐고 따져 묻지 못하는 행동하지 못하는 양심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와의 싸움에서 내는 기운은 두 배를 넘는다고 한다.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나는 분명 어떤 순간에는 가진 자의 축에 속할 것이고, 어떤 순간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축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듯. 조금씩이라도 행동하는 양심, 실천하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_ 내가 가진자의 입장에 섰을 때만이라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입장에 서서 따뜻한 손길로 "홀더(홀로 서고 더불어 산다.)"를 함께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는 너무 놀라운 사실에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길 멈추지 않았는데, 책을 덮으면서는 그냥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는 얼마 전 일정연수에서 전교조 강의를 나오신 선생님이 하신 말씀처럼 조금씩 '사회적 책무'를 행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 마음 속은 혼란스러움의 도가니
p29
어둠속에서 세 개비의 성냥에 불을 붙인다.
첫번째 성냥은 너의 얼굴을 보려고
두번째 성냥은 너의 두 눈을 보려고
마지막 성냥은 너의 입을 보려고
그리고 오는 송두리째 어둠을
너를 내 품에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서
- 자끄 프레베르 [밤의 파리]-
p102
연두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의 통역사의 입을 통해 자음과 모음으로 변하고 그것이 언어라는 몸뚱이를 획득해나가자 서유진은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연두 어머니 때문이었다. 연두 어머니가 온몸으로, 아마도 불운한 온 생의 힘을 다해 침착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틀어막힌 소리는 서유진의 몸뚱이 안을 여기저기 부딪다가 눈물로 천천히 고여왔다.
p117
아무리 저 아이의 엄마가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이가 귀를 먹은 것만도 가슴이 찢어졌을 텐데 저런 일까지 당하고 있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저 어린것이 엄마를 부르며 얼마나 울었을까요. 그 깜깜한 기숙사에서, 그 넓은 데서 어린게 혼자 남아서 얼마나 울었을까요...
p143
"따뜻하다... 나 예전에 너 참 좋아했었어, 몰랐지?"
...
"...알았어."
...
"아니, 그냥 좋아한 게 아니라 너랑 사귀고 싶었어. 남자로 말이야. 후배로 괜찮은 놈이다. 그런 게 아니구.... 내 얘기는 그 얘기야."
...
"그래.... 그것도 알았다구."
"거짓말!"
"정말이야."
강인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내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알았어. 그건 그냥 아는 거니까."
p170
강인호에게 보낸 유리의 편지
p172
병원에 드나들고 좋다는 약을 다 먹었지만 이미 때가 늦었대요.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미 글을 읽고 쓰고 읽을 줄 알았고 노래를 아주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 저는 그때부터 물속나라에 들어간 아이처럼 모든 사람이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는 걸 바라보며 완벽한 고독 속으로 쫓겨나버린 거예요. 저보다 노래를 못하던 아이들이 교단에 서서 노래하는 것을 볼 땐 가슴이 찢어져내리는 것만 같았죠.
p215
저는 솔직히 누가 교장선생님이고 누가 행정실장님인지 몰라요. 다만 저를 끌고 간 사람, 유리를 끌고 가 몹쓸 짓을 한 그 사람은 간단한 수화를 알고 있었어요. 제가 가서 그 수화를 하니까 한 사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어요.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
"어떤 수화지요, 증인?"
그 사람은 저를 끌고 가거나 유리를 끌고 간 뒤에 저보고 지금 본 걸 다른 곳에 가서 말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수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그 두 사람에게, 바로 그 수화,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수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알아듣고 저를 노려보았지요. 그 사람입니다.
p227
왜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이 맞고 고문당하고 벌받고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가나? 그럼 이 세상은 벌써 지옥이 아닐까? 대체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해줄 것인가? 누군가 그러더라. ... 열심히 공부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 말을 믿었지. 그런데 얼마 전, 자애학원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깨닫게 된 거야. 어른이 되면 그 대답을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야.
p231
어린시절 어머니는 말했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지, 하고. 그런데 이제 강인호는 생각했다. 그 무서운 하늘이 없을까봐 무섭다고.
p246-p247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p255
"그렇다면 당신은 무진시민 모두와 싸워야 할 거요. 사방에서 거짓말을 하며 서로서로를 눈감아주고 있어요. (...중략...)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은 더 많은 재물은 가끔 포기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한번만 눈감아 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하면-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p257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p264-p265
강선생과 서유진의 대화(단 한 번의 양보에 대한 것)
p289
홀더 - 홀로 서고 더불어 산다.
p290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최목사님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말씀하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