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초 수조
최영건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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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초 수조>는 구매한 이후에 책장에 오래도록 방치해둔 책들 중 하나였다. 작년 가을 즈음 동네 책방에서 이 책을 마주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어김없이 '취업'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고, 대학생 때의 순수한 즐거움은 배제된 채로 해결되지 못할 한숨만 오고 갔다. 그런 상태가 이어지던 시기였기에 <수초 수조>의 뒤표지에 새겨진 '불안과 강박의 심연'이라는 문구가 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우울은 어떤 식으로든 끝나지 못할 것만 같았고, 그럴 바에 차라리 그 안으로 더욱 파고들어 스스로가 사라지길 바랐다. 당시의 나는 물의 흐름에 따라 흐물거리던 수초와 닮아 있었으므로,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 자신과 닮아 있다고 느꼈던 책을 어째서 지금까지 읽지 않았을까. 누구도 말릴 수 없던 나약함을 새삼 다시 마주하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최영건 작가의 <수초 수조>는 수록된 모든 단편이 기이하고 막막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뭐랄까, 미래에 대한 암시를 찾길 바라며 잠들었던 꿈속에서 끝없는 안개밖에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다 읽고 나면 내가 정확히 어디에 서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고, 문득 슬픈 노래를 들으며 울고 싶어진다.

"많은 이야기들이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려서 때로 이제 쓸만한 이야기라고는 늙는 것밖에 남지 않은 듯 느껴졌다(p197)."


이 작품에는 노인과 젊은 청년 사이의 간극이 엿보인다. 젊은 작가에게서 노년기와 죽음에 관한 글을 쓰려는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삶에 대한 체념과 채울 수 없는 고독을 감각하며 멀고도 가까운 나의 노년기를 상상했다. 늙음을 떠올리면 죽음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죽음이 임박한 것처럼 그것을 감지하곤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도 커서 당시에 유행하던 '인체의 신비' 박물관을 거의 기다시피 하며 통과했다. 발가벗은 채로 누워있는 시체가 마치 나 자신인 것처럼 느껴진 탓이다. 노인이 되어서 짊어지게 될 '외로움'이라는 감정보다 기억하지도 못할 죽음의 순간이 어쩐지 더 실감 나도록 무섭다. 고독과 체념이라면 젊은 지금도 충분히 손에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축적된 경험으로 인내하고 버텨낼 수 있는 축에 속하지만, '죽음'은 한 가지의 이론으로 정립되지 못한 만큼 두려움이 증폭된다.

"이 세계(사후 세계)에는 마치 그런 것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지로써 불완전한 완전을 획득할 것이다. 이곳 아닌 세계에서의 불완전은 이곳에서의 완전이다(234p)."


우리는 '죽음'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각각의 사람마다 속도와 방법에만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게 되는 걸까. 작가는 그것이 '이름'이라고 말했다. '죽음'이라는 목적 달성으로 완전해진 후에 우리의 육체는 썩어 문드러지지만, '이름'만큼은 하나의 흔적으로 살아남는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뿐 아니라, 나와 같은 이름을 소유한 생명의 도움으로 나는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사후 세계로 입장하기 위해 들어야만 했던 이름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면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한때는 내가 미워했던 이름이 몇몇 세대를 걸쳐 이어지고,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리라는 사실을 떠올리다 보면 이름에 대한 애착이 생겨난다. 지금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겪을 수 있었던 이야기들을 무명의 영혼으로 사후 세계에 끌려가고 나서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늙음과 죽음의 언저리에 서 있는 <수초 수조>를 읽으면서 어릴 적 그토록 무서워하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곳곳에 자리해야 할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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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윅 클럽 여행기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허진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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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상자에서 이 책을 꺼내보고 두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읽다보니 스토리의 흡입력으로 인해 책이 겨우 여기서 끝날까봐 걱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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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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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 관해서라면 수도 없이 긍정적인 평을 들어왔으나, 나는 늘 이 작품을 읽는 일을 주저해왔다. '일'이라는 단어가 특히 나를 장류진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일'은 어쩐지 억울하고, 기피하고 싶은 대상으로만 느껴졌다. 일에 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내 이전에 그것을 시작해온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일과 직장이란 삶에서 제거할 수만 있다면 재빨리 기회를 낚아채야 하는 종류의 것처럼 여겨졌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 또한 스스로의 자리를 찾기가 무척 두려웠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일이 있는 삶을 논의하고자 한 <일의 기쁨과 슬픔>이 반가울 리 만무했다. 그러나 막상 내 책상을 찾고 보니 일이란 것에도 제 나름대로의 기쁨이 있었다. 내게는 해야 할 일과 돌아갈 자리가 있었고, 정당하게 번 소득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약간의 자유도 주어졌다. 일을 시작한 이후의 짧은 기간 동안 나는 이미 노동에서 비롯되는 슬픔과 기쁨을 적당히 감지해 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책을 읽을 용기도 낼 수 있었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 원을 내야 오만 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 이천 원을 내면 만 이천 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일'이라는 타이틀에 이토록 두려움을 느끼며 머뭇거리던 나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이 책에는 '일'보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새겨져 있다. 노동이 주는 슬픔과 기쁨이 아닌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면서 감각한 적 있는 온갖 감정에 관하여 서술하려는 작품이다. 장류진 작가의 작품집 속에는 세상의 논리를 이해하는 자와 물질이 정립한 질서를 의도치 않게 어그러뜨리는 사람 사이의 간극이 존재한다. 스스로의 감정과 자신만의 꿈을 돌보며 자본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이들은 민폐투성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통한다. 이들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고, 자본주의의 피가 내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쉬이 도태된다. 남들은 빠르게 회전하는 회전문을 잘만 통과해도, 그들은 그 속도를 버거워하며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타이밍을 놓쳐 버린다. 나도 자본이 만들어낸 세상의 거대한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남들처럼 인생을 '효율적'으로 살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스스로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게 없었지만, 이 의도치 않은 순진함으로 가족들을 답답하게 만들어 왔다. 그래서 "새댁이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와 같은 말을 작품 속에서 들을 때마다 자주 움찔거렸다. 나로서도 꽤 세상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어쩐지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에게 떼를 쓰고 싶어졌다.

*

"나에겐 고심 끝의 결정이자 엄청난 도전이고 인생의 특별한 이벤트였는데, 다 준비하고 나서 보니 결국 남들이 한 번씩 해보는 걸 나도 똑같이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게, 유행의 일부일 뿐이라는 게, 그저 준비운동을 마친 것일 뿐이라는 게,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장류진 작가의 글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소설 속의 상황이 나의 현실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숨기고 싶던 아픈 현실이 종이 위에 낱낱이 까발려지는데도 독자의 기분을 전혀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위트와 적절한 가벼움으로 버무려낸 현실은 웃프면서도, 공감을 이끌어낸다. 내가 어제저녁에라도 겪어 봤을 법한 날것의 일상을 이끌어 내는 것이 장류진 작가의 작품에 한 번 매료되고 나면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또한 훅 치고 들어오는 감동도 그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이번 작품집에서도 <탐페레 공항>에서 찰나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해 준 핀란드 할아버지 '얀'이 등장한다. 사소한 행동과 말 한마디로 다양한 일을 소화하며 삶을 버텨내고 있을 이들에게 이 작품은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또, 가본 적 없는 나라에서 날아온 사진 한 장은 먼 미래에 대한 기대와 그만큼 또 먼 과거에 꾸었던 꿈에 대한 향수를 자아낸다. 앞으로 정신없이 나아가며 지쳐 버릴 때쯤 내 안의 '오로라'를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것이 일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기쁨이자 슬픔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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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프렌즈, 그건 사랑한단 뜻이야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흔글·조성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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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실수를 만회할 시간은 필요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처음부터 좋은 사람일 수 없는 것처럼(p106)"

"사람은 누구나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 있어. 누군가의 습관을 애써 고쳐주려 하지 마. 적당히 멀리서 바라봐 주고 조용히 웃으며 지나가주고(p190)"

출판사 아르테의 서포터즈로 활동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캐릭터를 활용한 작품을 많이 읽고 있다. 대개 캐릭터에 고유의 성격을 부여해 그에 맞게 스토리가 흘러가지만, 이번 작품에서 카카오프렌즈는 이야기를 거드는 역할을 할 뿐이다.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위로를 건네는 글에 귀여운 카카오프렌즈 캐릭터가 더해져 매력이 배가 되었다. 글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옆을 살짝 돌아보면 그에 어울리는 카카오프렌즈의 그래픽이 삽입되어 있었다. 모두 이모티콘으로 즐겨 사용하던 것들이라 친숙하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스럽다.

책을 읽다 보니 카카오프렌즈 이모티콘이 처음 등장한 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또래들 사이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카카오프렌즈는 지속적으로 변신을 꾀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캐릭터인 만큼 그들 하나하나에 내 추억도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며 자주 쓰던 이모티콘이나 특정 인물과의 에피소드가 떠올라 자주 미소를 짓기도 했다. <카카오프렌즈, 그건 사랑한단 뜻이야>는 이른바 '추억 팔이'를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작품이다. 아니, 카카오프렌즈 이모티콘을 흔하게 사용하던 이들에게 모두 그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온 국민에게 읽고 대화할 만한 소재가 되어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 국민이라니, 너무 거창하게 들리는 단어지만, 그만큼 카카오프렌즈는 여러 해를 거쳐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왔다. 이 책의 사랑스러움과 산뜻함이 우울함과 외로움을 견디고 있을 이들에게 선물 같은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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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변신·단식 광대 창비세계문학 78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외 옮김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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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책장 한 칸을 가득 메운 어린이용 고전 속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갈수록 작품의 내용이 흐릿해져 종국에는 작품의 제대로 된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카프카가 준 충격의 여운은 무척 오래갔다. 생물 중에서도 더러움과 역겨움, 때로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벌레'로의 변신은 어린아이에게 크나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극한의 상황을 상상하는 일로부터 좀체 벗어날 수 없던 그때의 나는 실제의 삶에서 벌레로 변하고야 말았을 경우에 시련을 헤쳐나가는 방식에 대하여 이런저런 고민을 거듭했다. 변신의 공포가 이토록 나를 괴롭혔던 건 작품의 결말이 복귀가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고통을 겪고 나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어야 하는데, 카프카는 독자를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우리는 끝끝내 혐오스러운 몸뚱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잠자'가 보이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 껍데기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이제껏 광적으로 신봉해온 자본주의와 체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드러낸 '성실'과 '책임감'의 특질은 벌레라는 허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다. 당장에 피부로 와닿는 위기보다 앞으로의 생계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의식의 존속은 희극적이다.

한편으로 내가 긴긴 시간 동안 벗어던지기를 갈망하던 벌레로서의 짧은 삶이 "카프카의 작가적 정체성을 암시하는 은유"라는 해석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윗세대가 연예인을 '딴따라'로 지칭하듯이 소설가로서의 삶을 꿈꾸는 '카프카'가 그의 아버지에게는 '벌레'와도 같았던 것이다. 존중받아야 할 재능이 밥을 벌어먹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대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기꺼이 벌레가 되어야만 자유를 획득할 수 있고, 바라던 벌레가 되어서도 물질에 짓눌리게 되리라는 작품 속 암시는 어쩐지 나까지도 서러움을 느끼게 한다. '윽, 하필 벌레야!'라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억된 소설에서 그렇게라도 꿈을 존속시키고 싶던 어른의 슬픔을 이제서야 감각한다. <변신>은 모르는 단어가 많아 밑줄이 잔뜩 그어있던 책을 술술 넘길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다시 읽으며 새삼스럽게 스스로의 성장을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추억에 젖어 <변신>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지만, 내가 읽은 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선으로 <단식 광대>, <시골 의사>, <자칼과 아랍인> 등의 작품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작품 해설에서 임홍배 교수가 지적하듯 카프카의 작품은 여러 갈래로 해석될 여지가 많아 보인다. 우울하고 지쳐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기보다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어 독자마다 집어내는 포인트가 천차만별이리란 예감이 든다. 카프카의 문학은 부조리에 대항하기보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불합리함을 저만치 밀어내는 듯한 인상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짚어내고 끝없는 발전과 성장에 허덕이면서도 현 시스템을 유지하는 인간의 모습과도 닿아있다. 결국 문학과 우리의 현실에서 등장한 부당한 사회 구조는 기꺼이 벌레가 되거나 물에 뛰어들어야만 파국을 맞을 지도 모른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내가 죽음을 택해도, 그 다리 위에서는 수많은 노동자가 자신의 바퀴를 굴리며 어제와 같은 삶을 반복하게 되리란 것이다.

아아, 카프카의 글을 읽고 나니 허무함에 휩싸인다. 나는 아주 조금도 세상의 긍정적인 변신에 기여할 수 없는 것일까. '자유'라는 추상적이고 거대한 개념이 아니라 단순히 여기에서 나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인데, 카프카의 작품으로 마주한 세상은 버겁고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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