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뒤표지에서 이 문구를 발견하고는 단숨에 책에 대한 구매 욕구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는 보통의 경우에 부모가 내게 투자한 만큼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페인트>에도 언급되듯이 가족도 결국엔 비즈니스 관계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일방적으로 ‘을‘의 상태에 놓여있으면서도, 애초에 내가 ‘갑‘을 고른다는 발상은 품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건 내가 상상을 거듭하는 간절함으로 바꿔낼 수 없는 종류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변화의 가능성이 소실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철저하게 갑의 위치에서 내 의지대로 미래를 만들어 내는 그림-잔인하게도 부모의 조건에 의해 내 미래가 일정 부분 결정되니까-을 상정한다는 건 흥미로웠다. 국가에서 아이를 맡아 키운다는 설정이 꽤 일어날 법하다고 여겨 더욱 그랬다. 그러나 역시 마냥 즐겁다고만은 표현할 수 없는데, 부모를 ‘선택‘한다는 것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닌 까닭이다. 부모가 되는 일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고, 또 관계라는 건 꼭 한 번쯤 뒤틀리고야 마는 것이어서 막상 가족이 되고 보면 다들 엇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한편으로, 책 속에서 지적되듯이 우리가 부모에 관한 결정권을 요구하고 나서면, 부모들도 새삼 자신들이 가진 선택권을 깨닫고 더 나은 인재를 가족 관계에 영입하고 싶어질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자식과 부모 양쪽 모두 각자의 결점을 지니고 있고, 우린 그걸 어찌어찌 견디면서 나아가야만 한다.
가족 관계에서 생겨나는 비정상적인 문제들-가정 폭력과 아동학대 등-까지 인내하면서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최근 몇 년 새에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가족 관계의 실상으로 우리는 그것의 필요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문은 <페인트>에서도 발견되는데, ‘제누 301‘은 우리가 농수산품처럼 ‘원산지‘를 꼭 가져야만 하는지 독자에게 묻는다. 부모의 진정한 필요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제누 301‘을 통해 독자는 가족 범위의 확대를 목격하고, 하나의 자아가 형성되어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는 데 있어 꼭 생물학적 부모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는 하지만, <페인트>의 세계관에서처럼 부모의 부재가 당연시되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누군가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아이의 성장에 중대한 방해가 되는 요소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페인트>를 통해 우리는 좋은 어른 몇 명이 부모를 대체할 수 있고, 국가와 어른으로서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역할이 작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부모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보이나, 타의에 의해 아이들에게 생겨난 공백을 국가와 사회가 어느 정도 메꿔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가디‘ 역할을 맡아 공동의 부모로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사회로의 안정적인 진입을 도와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페인트>가 청소년 문학으로 완벽하다고 느꼈던 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행복을 발견하고 가꾸는 일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밉더라도 결국에 거기에 붙들리는 일을 멈추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기를 거부하면서도 우리는 끝끝내 부모에게서 간과할 수 없는 양의 영향을 받는다. 청소년 시기에는 더더욱 그랬던 기억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벗어나 너만의 행복을 쟁취하라고 말해주는 이 글에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페인트>의 존재가 더 많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의 미래가 부모의 존재 유무 혹은 특성과 관계없이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지금 이 순간부터 ‘페인팅‘해 나가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 꼭 ‘부모 면접‘ 시스템이 도입되어 부모를 선택하고서야 자신의 마음대로 인생을 색칠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꼭 알게 되었으면 싶다. 나로서도 그들의 페인팅에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어른이자 친구가 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