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유니콘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움직씨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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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름은/ 온 세상이 기억할 메아리가 될 거예요.36쪽, 「125번가와 아보메이」"


'흑인', '여성', 그리고 '퀴어'인 '블랙 유니콘'에게 세상은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로서의 고정된 위치를 부여했다. 집단 내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불편을 느끼는 사람도 없고, 세상은 무탈하게 돌아간다. 그러므로 집단 안팎에서 그 누구도 세상에 균열을 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시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 내재된 거짓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곪아버린 세상은 내내 침묵을 지키다가 위기에 이르렀을 때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 위험요소가 현 세대인 우리를 피해 가더라도 미래의 어느 세대에게는 피해를 줄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겨내고 불의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블랙 유니콘', 세상은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제힘으로 일어서서 '전사'가 되었다.

'전사'로서 그들의 주된 무기는 총이나 칼이 아니다. '오드리 로드'는 그런 것들 대신에 '시'라는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어 냈다. 행과 열 사이 압축된 단어 사이에서 그녀는 가면을 벗고, '검고 단단한 바위'를 드러낸다. 진실을 기록한다는 것은 비단 그녀 혼자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해를 본 적 없는 어린 씨앗들(81쪽)" 익사하지 않도록 “아이들의 입에 넣어 줄 빵과 같은/ 미래들을/길러 낼 단 하나의 지금(62쪽)"이다. 지금과 미래를 아우르는 '시'는 그녀에게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녀가 마주한 진실과 그로 인한 고통이 담긴 '시'는 그녀와 우리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보이지 않는 적과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싸움에서 우리가 연결되어 연대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드리 로드'의 '시'는 더없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때로는 우리 '공동의 결정'이 무색해지기도 한다. 이 또한 타인에 의해 감행된 공격일 것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우리의 적은 빈번하게 우리 내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가까운 적의 배신을 늘 염두에 둔 채로 이어지는 싸움은 고독하기만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곁에 둔 동지를 배신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린 모두 외로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침묵한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두렵다.//그러니 말하는 게 낫다/ 우리는 애초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었음을/기억하면서.(64쪽, 「살아남기 위한 기도」)"


죽음과 배신을 향한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이 싸움을 이어 나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돌아갈 집도 없이 살아가는 서러움과 눈물을 흘릴 땅이 없다는 외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난 아이에게 삶의 시작부터 떠돌이로서의 삶을 맛보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운다. 내 것이 아닌 죽음 속에서 어제인지 오늘인지 모를 눈물을 흘려가면서. 한편으로는 무지하고 순진한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깨닫도록 종용하고 싶기도 하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아프고, 때로는 죽음으로까지 내몰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그들의 두려움은 아주 깊고, 모든 것을 뛰어넘을 위력을 지녔다. 그러니 "이 두려움을/영영 잃지 않겠어/갚을 수 없는 그 무엇도/빚지지 않겠어.(190쪽)" 오늘도 그런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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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은 투쟁을 거듭하며 성장해 왔다. 대부분의 경우에 최소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나 또한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처음엔 그렇게 썼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야 비로소 그건 ‘공감‘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가난한‘ ‘여성‘ 그리고 ‘노동자‘로서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공감‘ 같은 것을 운운할 자격이 내게 있나,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심판자의 위치에 오른 후 타인의 삶을 심판하고, 나는 그들 앞에서 평생을 ˝겁우기˝로 살아왔다. 하지만 ˝겁우기˝라고 해서 다 같은 ˝겁우기˝가 아니고, 약자 사이에서도 미묘하게 계급이 갈리는 슬픔 같은 것을 작가 권여선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다. 자발적이었지만 분명히 타의적으로 서게 된 지금의 자리에서 우리는 종종 분노하고 세상을 향해 따지듯이 묻는다. 하지만 우리의 폭발은 중도에 방향을 잃고서 바로 옆 사람을 공격하고야 만다. 그보다도 더욱 치졸해서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우리가 애꿎은 곳에 화풀이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딱 한 번이라면서 눈을 감아준 사람들은 애초에 우리를 약자의 위치로 내몰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우리의 분노는 거기로 향하지를 못하고, 세상에 제일 많이 빼앗기면서도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무지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저격한다. 결국 내 잘못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보한 채로 세상 탓을 하며 삶을 이만큼이나 질질 끌고 왔다. 한국 문학이 하고자 했고, 또 지금도 이끌어 나가고 있는 투쟁에 나는 어떤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아직 멀었다˝라는 말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에 찬 목소리처럼 들린다.

똑같은 출발선 앞에 사람들을 세워두고 공동의 인권을 고려하려는 실질적인 노력은 이뤄진 적이 거의 없다. 소수의 사람들은 밖으로 밀려나고 세상의 질서 속으로 편입하는 일을 제지당해 왔다. 온갖 폭력과 차별, 멸시를 받으면서 하부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 도리어 ˝불쌍해······불쌍해서 안 돼·······˝라며 걱정을 내비친다. 그들은 한 번을 넘어가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어떤 후폭풍이 밀려들 수 있는지를 모르는 것 같다.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한 손에는 세상을 향한 긍정을 쥐고 있는 그들이 바라는 건 ‘자유‘다. 내 생각에 자유라는 건 좀 도난당하기 쉬운 가치다. 자유는 그로 인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내가 사회적 책임을 질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서 사회가 자유를 빼앗아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인간으로서 내게 응당 주어진 ‘권리‘를 누려야겠다고 말했어야만 했다. 이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라고 말을 내뱉으면 그 이후에는 그것을 갈취하려는 상대의 잘잘못을 따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렵기만 한 세상 속에서 자기 권리를 되찾겠다고 득달같이 달려든 사람이 여전히 수두룩한데, 자기 권리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움츠러들어 있는 ˝겁우기들˝에게 까지 세상은 친절을 베풀어 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세상은 어떤 유토피아로부터 아직도 너무 멀리 있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살아서 자꾸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절벽에 매달려서 피는 꽃이 있다는 건 참 말이 안 되는데, 문학을 읽다 보면 그런 일들이 더러 생겨난다.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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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삶의 ‘핸들‘이 온전하게 주어진 적이 있었던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다가온 낯선 이에게 그 ‘핸들‘이라는 것을 여성은 원 없이 빼앗기며 살아왔다. 자신의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빼앗아 얻어낸 것처럼 그들은 슬금슬금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보이지 않는 슬픔을 감각하며 자꾸만 지는 싸움을 하는 일은 그들 본인에게도, 그리고 실패를 답습하게 될 두려움에 휩싸인 다음 세대의 여성에게도 힘이 들었다. 그러니까 남 탓, 세상 탓을 하며 거기에서 주저앉았다면 일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 조우리의 소설집은 어려운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들의 강인함은 거창한 목적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저 거기에 자신의 일상이 있기 때문에,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세상에서 ‘11번 출구‘를 끝끝내 찾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는 일어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건 그저 ˝번갈아 핸들을 잡˝는 것이다. 일상을 성실하게 쌓는 것으로 긴긴 싸움의 두려움을 몰아내는 내적인 강인함은 작가 김금희의 《복자에게》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퀴어‘이고, ‘노동자‘이기도 하다. 잘못한 게 없고 위로받을 일 또한 없는데, 타인에 의해 그들의 위치는 세상 밖으로 고정된다. 안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그들은 ‘펭귄‘처럼 서로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방향을 잃은 분노를 그러안은 사람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꾸만 그들에게 욕을 했고, 폭력을 행사했다. 화를 내야 하는 건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본인들도 알면서 같은 약자끼리 계급을 나누고 질서를 세우고, 또 차별을 했다.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을 ‘나사‘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느 철물점에서든 대체물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은 ‘규격‘에 구애받지 않는 나사다. 그러므로 ˝나사라는 건 너무 많은 곳에 너무 많이 있어서 언제든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없는 일˝이 흔하게 생겨날 것이다. 하나씩 ‘나사‘를 잃다 보면 지금 이 세계라는 ‘의자‘를 떠받치지 못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사실 ‘나사‘는 ‘여성‘, ‘퀴어‘, 또 ‘노동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어이다. 보편적으로 통용되지만 혼란스럽기만 한 질서 속에서 ‘나사‘에 불과한 그들은, 또 우리는 늘 ˝말이 돼. 하다 보면 다 돼.˝라는 말을 듣는다.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은 절대 없고, 우리는 세상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신체적, 혹은 정신적 폭력을 감수한다. 그러던 중 기존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여성‘으로서, ‘퀴어‘로서, 또 ‘노동자‘로서 자신을 지키려는 결심을 세웠다. 자신을 지키는 일을 통해 그들 모두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손끝에 닿지 않아도 그 존재가 너무도 명확했던 문, 벽, 또는 천장에 균열을 내면서 그들은 물었다: ˝정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질문을 회피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분명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갈 결심을 세워야만 한다. ˝이곳을 벗어나도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 다섯 마리‘가 되어 함께 이 밤을 버텨낼 도리밖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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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그 단어를 정의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릴 적 매일 쓰던 일기처럼 친숙했던 ‘에세이‘는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자기 확장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의 발로이고, 더 나아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에세이‘라는 장르는 한때의 유행 같은 얄팍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 타인의 사적인 일상 속에서 나는 익숙한 세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었고, 삶은 끝끝내 견딜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누군가는 ‘에세이‘를 쉬운 장르로 가볍게 받아들이는 지도 모르지만, 나는 늘 ‘에세이‘가 어려웠다. 특히 ‘에세이‘ 식의 글을 써야 할 때가 그랬다. 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릴 때도 일기 쓰는 일이 제일 곤란하게 느껴졌다. 집과 학원 사이를 오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도대체 어떤 흥미로운 포인트를 잡아내라고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달리 친구들은 글 쓰는 건 좋아하지 않아도 막상 써낸 글들을 읽어보면 하루하루를 서로 다른 즐거움으로 기록하고는 했다. 그래서 내가 최후에 선택한 방법은 되지도 않는 상상을 현실인 것처럼 지어내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진짜라고 믿으면서 손이 저리도록 연필을 꽉 쥐어가며 썼다. 예를 들면, 좁아터진 동네에서 스무 명의 친구들과 단체 줄넘기를 하였습니다, 같은 일상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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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은모든‘과 ‘조진주‘의 글 속에서는 스스로의 잘못도 아닌 일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기를 종용 받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피해를 입은 쪽이 사과를 하고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는 편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좋을 거라고 우리는 늘 강요받아왔다. 하지만 역시 ˝사과를 주고받을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다. 그래서 세상에 뻣뻣하게 구는 ‘현지‘의 태도가 좋았다. 미숙한 어른들을 다그치지 않고, 더 어른스럽게 모든 일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내보여서 마음이 저릿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해서 우리는 굽히지 않고 빳빳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의 핍진함으로부터 짓눌렸던 마음이 「501호의 좀비」에서 해소되는 것도 같았다. 한편으로 가해자의 죽음이 완전한 대안은 아니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세랑 작가의 글처럼 어떤 죽음은 가해다. 죽음으로 501호 좀비의 위치성이 피해자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적인) 죽음을 (육체적인) 죽음으로 대갚음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자꾸 스친다. 그렇게 찝찝한 세상을 여태 살아가고 있는 건 「둥둥」에서처럼 무결한 사랑을 믿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가 이유리의 작품에서도 결국 우리는 주체적인 입장을 얻어내지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붙들고 싶은 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할 때도 있다.

‘소설‘의 느낌은 ‘리뷰‘까지 이어진다. 여성과 흑인, 퀴어로서의 삶은(작가 최지은, 김병운은 각각 ‘임신 중지‘와 ‘성별, 인종, 성 정체성‘에 관한 작품을 읽고 보고 썼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종종 곁으로 내몰린다. 그런 세상을 향해 작가 김병운은 드라마 포스터의 문장을 인용한다: ˝What if you could rewrite the story?˝. 하나의 문장을 통해 ˝내가 보고 싶고 쓰고 싶고 응원하고 싶은 건 바로 이런 거라는 확신˝에 나 또한 고양되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이곳의 이야기를 다시 써나가야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른다. 비로소 그때 우리가 온갖 이유로 잃어버린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현실과 그것을 뒤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분명한 확신을 기록하기 위해서 ‘에세이‘만큼 좋은 장르가 또 있을까. 정말이지 완벽한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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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라는 사람을 어떤 단어로 소개해야 옳을까. 작가, 영화감독, 그녀의 이름 앞에 이런 수식어는 너무 진부하다. 그리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그녀의 삶에 한계를 부여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책 속에서 만난 ‘이길보라‘는 누구보다도 뚜렷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글과 영상은 그런 신념을 드러내기 위한 수많은 수단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길보라‘는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균열을 내려는 사람이고, 또한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계급제적 질서가 없는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다. 끝없는 배움과 도전, 차이를 포용하려는 태도는 본래 ‘청년‘을 정의하는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 장류진이 추천사에서 했던 말처럼 ‘청년‘이라는 단어는 그간 눈에 띄게 오염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길보라‘가 하는 모든 일에 ‘괜찮아, 경험‘이라고 응원해 주었던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경험을 통해 체득한 삶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그녀 본인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청년‘을 새로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 사이의 경계가 소멸되었어야 옳다. 그러나 청년 세대와 기성세대는 완전히 분리되었고, 어린아이들은 주거 형태에 따라 친구를 구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길보라‘가 보여주는 암스테르담에서의 삶은 비행기로 10시간 거리보다 더 멀리 있는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그곳에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변명할 필요 없이 그냥 그대로 존재하고, 쓸데없는 위계질서는 배제한 채로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도 개개인은 독립적으로 존중받는다. 끊임없이 타인에게서 정상성을 의심받아야 하는 한국과는 천지차이다. 물론 ‘이길보라‘는 네덜란드에도 인종차별 등의 문제가 존재하고, 절대 그곳이 유토피아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조선‘을 꿈꾸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작은 기회마저 박탈당한 시대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떠날 꿈을 꾸는 것뿐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타인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기본˝과 ˝당연한 디폴트 값˝이 적용되지 않는 한국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청년이 여전히 스스로를 ‘코리안‘으로 명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켜내고 싸우고 투쟁하는 동료들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오지랖 넓게 타인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가끔씩 생각지도 못한 성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사회에 팽배해 있는 차별과 배제, 멸시를 떠올려 본다면 한국에는 개선되어야 할 여지가 아주 많다. 이와 동시에 미래 세대를 위해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았고, 또 살아가고 있는 곳이기에 ˝그들과의 연대는 어디에 있든 나 자신을 ‘코리안‘으로 부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여성‘이나 ‘청년 세대‘로 명명하는 일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윗세대에게 도움을 받았듯이 나도 후대의 ‘여성‘과 ‘청년 세대‘에게 내가 받은 도움을 돌려주고 싶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꿋꿋이 살아있다.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돈을 버리는 시간을 버리든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보라야, 괜찮아, 경험."
- P44

"(...)우리는 연결되어 있어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아주머니는 엄마와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는, 우리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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