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은 투쟁을 거듭하며 성장해 왔다. 대부분의 경우에 최소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나 또한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처음엔 그렇게 썼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야 비로소 그건 ‘공감‘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가난한‘ ‘여성‘ 그리고 ‘노동자‘로서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공감‘ 같은 것을 운운할 자격이 내게 있나,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심판자의 위치에 오른 후 타인의 삶을 심판하고, 나는 그들 앞에서 평생을 ˝겁우기˝로 살아왔다. 하지만 ˝겁우기˝라고 해서 다 같은 ˝겁우기˝가 아니고, 약자 사이에서도 미묘하게 계급이 갈리는 슬픔 같은 것을 작가 권여선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다. 자발적이었지만 분명히 타의적으로 서게 된 지금의 자리에서 우리는 종종 분노하고 세상을 향해 따지듯이 묻는다. 하지만 우리의 폭발은 중도에 방향을 잃고서 바로 옆 사람을 공격하고야 만다. 그보다도 더욱 치졸해서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우리가 애꿎은 곳에 화풀이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딱 한 번이라면서 눈을 감아준 사람들은 애초에 우리를 약자의 위치로 내몰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우리의 분노는 거기로 향하지를 못하고, 세상에 제일 많이 빼앗기면서도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무지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저격한다. 결국 내 잘못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보한 채로 세상 탓을 하며 삶을 이만큼이나 질질 끌고 왔다. 한국 문학이 하고자 했고, 또 지금도 이끌어 나가고 있는 투쟁에 나는 어떤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아직 멀었다˝라는 말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에 찬 목소리처럼 들린다.
똑같은 출발선 앞에 사람들을 세워두고 공동의 인권을 고려하려는 실질적인 노력은 이뤄진 적이 거의 없다. 소수의 사람들은 밖으로 밀려나고 세상의 질서 속으로 편입하는 일을 제지당해 왔다. 온갖 폭력과 차별, 멸시를 받으면서 하부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 도리어 ˝불쌍해······불쌍해서 안 돼·······˝라며 걱정을 내비친다. 그들은 한 번을 넘어가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어떤 후폭풍이 밀려들 수 있는지를 모르는 것 같다.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한 손에는 세상을 향한 긍정을 쥐고 있는 그들이 바라는 건 ‘자유‘다. 내 생각에 자유라는 건 좀 도난당하기 쉬운 가치다. 자유는 그로 인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내가 사회적 책임을 질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서 사회가 자유를 빼앗아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인간으로서 내게 응당 주어진 ‘권리‘를 누려야겠다고 말했어야만 했다. 이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라고 말을 내뱉으면 그 이후에는 그것을 갈취하려는 상대의 잘잘못을 따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렵기만 한 세상 속에서 자기 권리를 되찾겠다고 득달같이 달려든 사람이 여전히 수두룩한데, 자기 권리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움츠러들어 있는 ˝겁우기들˝에게 까지 세상은 친절을 베풀어 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세상은 어떤 유토피아로부터 아직도 너무 멀리 있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살아서 자꾸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절벽에 매달려서 피는 꽃이 있다는 건 참 말이 안 되는데, 문학을 읽다 보면 그런 일들이 더러 생겨난다. 신기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