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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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하는 책마다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조금 지난) 신작. 처음 이 글을 발표한 이후 40여 년간의 공백을 거쳐 새롭게 탄생했다는 스토리로 더욱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작가를 괴롭혀온 글은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충분한 기대를 가지고 700여 쪽의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메모장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자신보다 한 살이 어렸던 소녀를 '나'는 너무도 사랑했지만 그녀와의 행복은 기대만큼 오래가지 않는다. 소녀가 펑 하고 이 세계로부터 증발해 버린 것이다. '나'에게 백 퍼센트였던 첫사랑을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기 시작해야 하는지 소년은 알지 못한다. 힌트라고는 소녀가 말해준 한 도시에 대한 이야기뿐이지만 구전으로만 전해진 그곳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하루키의 문학은 그렇게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우리는 그 세계에 도달할 만큼 우리 자신이 충분히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이 책은 언뜻 보면 로맨스 소설처럼 비친다. 유일한 사랑과의 합일을 위해 이쪽 세계로부터 저쪽 세계로 모든 것을 걸고 건너간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이렇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찌어찌 건너간 도시에서 '나'는 그토록 그리웠던 소녀를 만나는 데는 성공하지만 도리어 나아갈 길을 잃는다. 도시는 현실 세계와 이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상향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제 세계와 자신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이유였던 소녀가 도시 안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에겐 벽 안의 도시를 현실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실제 삶과 가상의 세계 사이에서 어느 쪽이 현실이고 비현실인지, 또한 자신이 어느 세계에 속하고 싶은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도시 밖으로 나온 이후에도 '나'의 고민은 점점 깊어진다. 도시 안과 밖의 자신 중 어느 쪽이 현실이고 본체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자기 고뇌의 소설로서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현대인은 자신 안에 구축된 세계와 사회 밖을 끊임없이 오가며 진정한 자신을 찾고 이를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 도서관장이었던 '고야스' 씨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452쪽)" 그러면서 덧붙이는 것이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452쪽)" 그렇다면 '무언가'를 찾는 일이 이제 중요해진다. 본체와 그림자 사이를 흔들리며 걸어가는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대상이 필요한가. 소설 속의 '나' 또한 이를 쉽게 찾아내지 못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반복한다.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681쪽)" 이 문장은 또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고쳐보고자 했던 작가 본인의 독백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글을 만들어낸 작가도, 그 안에서 탄생한 '나'도, 그리고 지금 현실을 견디고 있는 우리도 평생에 걸쳐 미지의 '무언가'를 기다린다.


꿈과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 그리고 현실 사이를 오가며 시간이 축적되는 동안 '나'는 "중요한 무언가가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영원히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 다음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758-9쪽)"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대목에서 '나'의 첫사랑이었던 소녀는 하나의 발판에 불과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소녀라는 대상을 진심으로 바라고 그 소망을 통해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넘어왔지만, 그 안에서 끝내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스스로 만들어낸 벽을 뚫고 허공으로부터 현실로 몸을 내던지려 할 때 그 용감한 낙하를 감내하고 포용해 주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나 자신을 강하고 깊게 믿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내고 싶었던 단 하나의 길이다. "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380쪽)" 인간은 이렇게 연약하면서도 자신을 구해낼 만큼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한다.


 '나'와 '나'가 만들어낸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또 하나의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자기 자신을 믿고 세상 밖으로 나와보라고 말하는 이 소설을 연말연시 읽어볼 만한 책으로 건네본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P358

그것이 고야스 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들이어도 좋고 딸이어도 좋다. 그 아이가 나의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써 계승해 준다면. - P382

"그렇게 참을성 있게 기다릴 만한 가치가, 나에게 있을까?"
"글쎄." 나는 말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들여서라도 기다리고 싶다는 마음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 P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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