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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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당신이 깜둥이가 아닌 걸 아는 한, 다 괜찮아. 당신이 얼마든지 까매져도 상관이 없다고,, 당신이 깜둥이가 아니라는 걸 내가 아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야. 우리 집안에 깜둥이는 안 돼.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55쪽)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가 '넬라 라슨'의 『패싱』은 흑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나는 등의 이유로 덜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흑인은 이른바 '패싱'이 가능하다. 백인과 흑인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의 시선으로 볼 때 '패싱'은 왠지 우스운 구석이 있다. 피부색 하나 때문에 온갖 시련과 전쟁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패싱'은 평생 비주류로 취급받아 온 흑인이 백인 사회에 가하는 비웃음 섞인 반격이다.


소설에서 '아이린'과 '클레어'는 '패싱'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용한다. '클레어'는 자신의 피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백인 행세를 하지만, 아프리카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할렘 가의 사람들과 '아이린'은 '패싱'에 대해 좀 더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패싱'이 주는 이점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려는 시도들을 경멸한다. 사실 백인으로 행세하는 것이나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패싱'을 추구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선택을 내리든 간에 흑인은 소수자로서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본능적인 신의. 어째서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까? 어째서 신의의 대상에 클레어를 포함시켜야 하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티끌만큼도 배려하지 않는 클레어를.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라기보다 무딘 절망에 가까웠다. 자신의 관점을 바꿀 수 없음을, 개인을 인종에서, 자신을 클레어로부터 떼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136쪽)

『패싱』은 또한 동일한 인종 간의 연대감에 주목한다. '아이린'은 자신과 같은 흑인인 '클레어'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고발하지 못한다. '패싱'은 위험하고 인종 배반적이면서도, 흑인이라면 한 번쯤은 도전하고 싶은 열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종'의 끈에 묶여 있는 '아이린'과 달리 '클레어'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아이린'은 흑인을 모욕하는 남편 앞에서도 여전히 백인 행세를 하는 '클레어'가 아니라, 거침없이 성취하고 자유롭게 활보하는 '클레어'의 모습에서 자극을 받는다. 그렇게 『패싱』은 인종 문제로부터 시작해 복잡다단한 양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소설의 제목에 활용된 '패싱'은 이제 백인 행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세기 후반부터 이는 사회가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을 숨기는 문제로까지 논의가 확대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할 만큼 차별과 배제의 기준이 다양해지고 심화되면서 『패싱』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경계지대에 서고, 또 누군가를 세우면서 편 가르기를 시도하고, 분리의 대상이 되어 표류한다. 이전부터 확실하다고 믿어 온 우리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어디에나 속할 수 있게 된 지금이 오히려 전혀 다른 시대로 가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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