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1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이란 매 순간 전쟁이 아닐까? 자연의 조건 그 자체가 지속적인 전투, 가장 강한 자의 승리, 행동으로 유지되고 쇄신되는 힘, 죽음에서 늘 새롭고 신선하게 부활하는 생명이 아닐까?(19쪽)


소설 『패주』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파리코뮌을 생생하게 증언한 작가 에밀 졸라의 걸작이다. 작가는 전쟁의 중심이 된 스당의 현장과 관련 기록물을 치밀하게 조사하여 한 시대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기대를 압도적인 서사로 복원하였다. 엉망진창인 군의 질서 체계와 적 앞에서의 내부 분열 등 프랑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에도 에밀 졸라는 주저함이 없다. 우리는 에밀 졸라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바닥까지 드러난 프랑스의 모습을 목도한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참패에 따른 제2제정의 몰락, 그리고 파리코뮌 학살극을 지켜보는 동안 정말이지 너무도 많은 이들의 죽음을 겪어야만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과 끝없는 기다림 속에서 굶주릴 대로 굶주려 짐승과도 같아진 이들의 눈빛은 참담하다는 말로도 모자라다. 이처럼 끔찍하게 죽어간 생명들을 고려하면 『패주』를 반전주의 소설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에밀 졸라가 주목하는 것은 전쟁의 '재생적' 가치에 있다. '모리스'는 "전쟁이란 죽음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생명(694쪽)"이라고 표현하였고, '장'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바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프랑스의 재건'이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에밀 졸라는 『패주』를 통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복잡한 양상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는 상식 밖을 벗어나는 행동들을 일삼고, 전쟁을 지켜보는 독자들을 끊임없이 초조하게 만든다. 전쟁의 초반, 프랑스 군은 여전히 나폴레옹이 이룩한 제1제정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다. 프랑스 군에게 전쟁이란 오로지 승리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군의 오만은 자취를 감추고, 그들은 자신들이 재앙을 당하도록 운명 지어진 오합지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그들은 싸워야 할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수뇌부의 우왕좌왕하는 지도 가운데서 점점 더 사지로 내몰린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프로이센 군 앞에서 프랑스 군은 점점 더 전멸을 향해 나아간다.


몇 주 동안 영웅적인 전투를 하며 서로 마음을 나눈 것이 이런 가증스러운 행위, 이런 흉측하고 어리석은 형제살해를 하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아냐, 아냐, 그럴 순 없어.(677쪽)

뻔히 예정된 전쟁의 결과보다도 정부군과 파리코뮌의 대립이 더욱더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단결된 목표 아래서 공동으로 대적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를 향해 총칼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모리스'와 '장'은 분열된 두 세계의 양축을 담당한다. 한때 지식인으로서 파리에서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모리스'는 자신과 같은 존재가 모조리 불에 타 사라져버린 땅 위에 '장'과 같은 선량한 농부의 손이 새롭게 태어난 프랑스를 일궈야 한다고 믿는다. '장'과 '모리스'로 분리된 두 세계는 제 살을 도려내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만 했던 프랑스의 아픔을 보여준다. 파국으로 치닫기 전만 해도 '장'과 '모리스'는 계급과 문화를 뛰어넘는 순수하고 원초적인 우정으로 전쟁 속에서도 인류애가 피어날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종말이 더욱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소설을 읽는 내내 프랑스의 끈질긴 생명력은 독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황폐해진 땅 위에서도 시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갖가지 수를 통해 애를 썼고, 절망감 속에서도 의사들은 죽어가는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분투했으며, 프랑스의 자유라는 꿈을 위해 패배가 예상된 가운데서도 누군가는 싸움을 지속하고자 했다. 어이없는 방식으로 패주가 진행되었고, 자신의 형제를 살해하는 위기에 놓여야 했지만, 인류의 생명력과 근면성, 자유를 향한 열망 등은 여전히 전쟁의 '재생적' 가치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전쟁 중에도 먹고는 살아야 했던 시민들이 있었던 것처럼 아픈 과거가 있었음에도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썩은 가지를 잘라내고 다시 푸르른 줄기를 내뻗은 나무가 뿌리의 기억을 잊지 않고 소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