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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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300쪽)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관해 묻고 답하고자 했던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난 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에 매혹되어 있던 때에 중고서점을 방문했다가 『남아 있는 나날』을 발견하게 되었다. 『클라라와 태양』과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나날』 또한 흡인력 있는 문체가 돋보인다. '달링턴 홀'의 집사로 일생을 살아온 '스티븐스'가 여행길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추해 보는 이 책은 자칫하면 지루해지기 쉽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특유의 문체로 끝까지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끈다.


'달링턴 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집사 '스티븐스'는 새로운 주인인 '패러데이' 어르신의 호의로 6일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길에서 '스티븐스'는 아버지 세대부터 이어져 온 집사로서의 삶을 떠올리며,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지 위대한 집사의 근간이 되는 품위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위해 '사적인 실존'을 철저하게 포기한 '스티븐스'의 일대기를 듣고 있자면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사적인 실존'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해 온 우리의 역사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말의 반항도 없이 오로지 주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다. 주인을 향한 신뢰와 복종을 통해 인류에 이바지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할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주인과 집사 간 관계가 존속될 수 있도록 떠받치는 굳건한 기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확고한 소신'을 기대할 수 없으며, 자신의 소신대로 세상만사를 논의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티븐스'나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오로지 명령에 복종하고 상위 포식자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의 '품위'만이 허락된다.


당신은 어떤가요, 스티븐스 씨?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290쪽)

'스티븐스'가 삶에 대해 느끼는 승리감은 주인의 선함과 위대함을 통해서만 획득이나 유지가 가능하다. 주인인 '달링턴 경'의 행보에 어떠한 이견도 없었던 '스티븐스'는 자신이 세상의 위대한 중심축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달링턴 경'의 명성이 세상의 무수한 비난에 부딪히면서 '스티븐스'는 생전 처음으로 인생의 황혼 녘에 접어든다. 나이와 관계없이 주인의 명성에 따라 '스티븐스'의 낮과 밤이 결정되어 왔던 것이다. 6일간의 자유는 '달링턴 경'이라는 찬란한 태양이 저물고 난 후 찾아온 저녁을 '스티븐스'가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스티븐스'도 과거의 영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추억에 젖어 자신의 현재에 공허함을 느낀다. 이제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달링턴 경'에게 모두 주어버렸으니 자신에게는 품위를 포함해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엔 과거를 훌훌 털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면서 '스티븐스'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일과 분리된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이 가진 가능성을 발견한 '스티븐스'의 삶은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링턴 홀로 돌아간 '스티븐스'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삶의 허망함과 상실감을 딛고 다시 태어난 그에게 남은 모든 나날이 어떤 색채를 띠게 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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