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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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꽃뱀 살인사건'으로 불리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사건의 중심에는 '기지마 가나에'가 있었다. 일본 내에서 사건이 이처럼 주목받은 데에는 용의자로 지목된 '기지마 가나에'의 용모가 큰 몫을 차지했다. 기존의 '꽃뱀'에 대한 인식을 '기지마 가나에'가 완전히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용의자의 외모만이 화제가 되었던 그 사건에서 작가 '유즈키 아사코'는 남성들의 "요리 잘하는 가정적인 여자에 대한 환상과 가족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발견하고, 글쓰기에 착수한다. 일본 남성들이 '기지마 가나에'에게 품었던 환상과 신뢰는 분명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가정주부로 살았던 이전 세대의 여성부터 맞벌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의 여성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내려오는 압박감이다. 그런 와중에 "대체 가정적이란 게 뭘까요. 가정적인 맛이니 가정적인 여성이니.(561쪽)"라고 묻는 이 책에 강렬하게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버터』는 대충 끼니를 때우는 데 급급한 현대인이 요리를 통해 자신의 적당량을 찾아가는 자아실현의 소설이자 더불어 살아가며 자신의 포만감을 채우는 자아 충족의 소설이다.


실존 인물인 '기지마 가나에'를 모티브로 한 '가지이 마나코'를 탐구하면서 이상적인 여성상 혹은 가족상의 이미지를 부수고,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 『버터』의 방식이다. 요리 잘하는 온순한 여성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는 '가지이 마나코'와 유능한 여성 기자 '리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지이'를 취재하는 동안 '리카'는 자신을 위해 먹고 요리하는 삶의 태도를 통해 일과 자신을 분리하고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다. 타인의 시선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적당량에 맞춰 살아가는 듯한 '가지이 마나코'는 빠르게 '리카'를 사로잡는다. '리카'뿐만이 아니다. 여자다움과 봉사정신을 강조하는 면만 제한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가지이'의 모습은 현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이라고 불릴 만하다.


피해자들은 가지이가 없어도, 여자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 기자로서, 나는 그 말을 가장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217쪽)



'가지이 마나코' 사건의 피해자들은 '가지이'가 없으면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없는 아기처럼 군다. 남성들의 유아적인 태도와 '가지이 마나코'에게 덧씌워진 환상을 파헤치면서 '리카'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남성들에게 수없이 분노한다. 때때로 '리카'의 분노가 피해자 남성뿐만 아니라, '리카' 자신이나 우리 모두를 향해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삶에 치여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볼 짧은 시간조차 낼 수 없었던 현대인들에게 '리카'가 꾸짖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의미에서 '가지이 마나코'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로 몸을 차곡차곡 채울 줄 알았고, 여러 가지 맛을 통해 배운 삶으로 자기 자신을 관대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리카'는 '가지이 마나코'에게 배운 자기 충족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녀는 요리를 해서 자기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함께 나눔으로써 행복을 배가시킨다. 비약적인 진보는 누군가 기다리는 집의 기대감을 알려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리'와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의 '가족', 그 두 가지가 불평등하고 까칠한 세상에 맞서는 '리카'만의 장벽이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계속 성장해야만 한다는 압박감 대신에 버터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그들의 따뜻한 존재감이 『버터』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치도록 '버터'처럼 든든하게 우리의 뱃속을 채운다.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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