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귤의 맛 ㅣ 문학동네 청소년 48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5월
평점 :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눈부신 시간들
천천히 답을 찾아가는 청소년의 성장서사

초록색일 때 수확해서 혼자 익은 귤, 그리고 나무와 햇볕에서 끝까지 영양분을 받은 귤. 이미 가지를 잘린 후 제한된 양분만 가지고 덩치를 키우고 맛을 채우며 자라는 열매들이 있다. 나는, 그리고 너희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161쪽)
작가 '조남주'의 청소년 소설 『귤의 맛』은 '다윤', '소란', '해인' 그리고 '은지' 개개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무리로부터 떨어진 아이들 하나하나가 세상을 견디기엔 너무 벅차 보인다. 진학, 친구관계 등을 둘러싼 개인-개인, 혹은 개인-사회 간의 충돌은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지낸 이들에게는 몹시 익숙한 풍경이다. 한국 사회-학교-부모-또래집단으로 이어지는 사회구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이들은 세상이 가리킨 방향으로 목숨을 걸고 뛴다. 더 나은 단계를 위한 필수적인 절차로 여겨지는 곳이 소설 속에서는 바로 '다난동'이다.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는 '신영진'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을 품지 않은 아이들은 열패감과 좌절감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다난동'으로 가기만 하면 '신영진'에서와는 전혀 다른 단계로의 진입이 가능한 듯 보였지만, 막상 별천지에 가서도 아이들은 자신과 남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자라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자연스러운 방향과 속도로 변하고 있는 걸까?(61쪽)" 아이들은 확신할 수 없었다.
고립된 개체에 불과했던 아이들은 '영화부'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우리'라는 이름 아래에서 하나로 거듭난다. 친구들과 함께 '우리'가 되기 이전에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 종종 배제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직접 결정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겨를도 없이 어른들만의 리그는 시작되었고, 피보호자로서의 아이들은 주체성 상실과 함께 자신감을 잃었다. 그러나 친구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타인과의 절차에 참여하면서 무언가를 잃거나 또 얻는다. 부모의 보호,라는 껍질을 벗겨 놓고 보니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자신이 얻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았고, 스스로에게 가장 최선인 선택들을 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했다.

청소년 문학을 읽을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귤의 맛』은 특히 성인이 된 이후의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건 역시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스러운 방향과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는 계획이 없어도 천천히 답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어가면, 어딘가에 취업하면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인생의 답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나이가 들수록 뼈저리게 깨달을 뿐이다. 나만 답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청소년기와는 전혀 다른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이제는 답 같은 걸 찾으려는 낭만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라고, 이미 모든 게 늦어버렸다고 스스로를 재촉할 때마다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간 인생의 선배들은 "천천히 답을 찾아가면 된다.(205쪽)"고 여전히 말한다. 그러니까 『귤의 맛』은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유효한 소설이다. 결국엔 지긋지긋한 인간관계 속에서 삶의 놀라움이나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 '조남주'는 부모님의 이혼 후 엄마와 할머니의 손에 자란 '은지'나 바쁜 엄마를 대신해 집안 남성들의 끼니를 챙겨 온 '해인' 등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삶을 묘사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실 『귤의 맛』에서 그 점이 제일 좋았다,고 덧붙이고 싶다.
알고 있는 청소년이 한 명도 없어서 서러울 지경이다. 좀 더 어린 내가 눈앞에 서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귤의 맛』은 내가 내린 모든 선택이 결국에는 전부 옳았다고 말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과거와의 화해는 좀 더 단단한 여성이 되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다독인다.
당연하지. 멀쩡한 두 손 갖고 자기 밥도 못 차려 먹는 인간들은 다 등신 새끼야. 너도 계속 등신 새끼로 살고 싶지 않으면 나와서 상 펴고 반찬 꺼내. - P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