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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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후로 내가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울었던 적이 있었나. 소리 내서 울었던 적이 있었나. 억울함과 서운함, 고통과 후회로 사무친 눈물이 아니라 맑고 개운한 눈물. 몸과 마음속 모든 낡은 것들이 빠져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구나.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246, 「오로라의 밤」)


주말 동안 다 읽고 추천할 만한 책 몇 권을 골라 할머니 댁에 들렀다. 우리 집 유일한 독서인구인 외삼촌에게 책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옆에서 같이 책을 들춰보던 이모의 손이 『우리가 쓴 것』에서 멈췄다. 내가 가져간 건 가제본이었으므로, 샛노란 표지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책과 이모 사이에 어떤 운명적인 끌림이 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진부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82년생 김지영』을 쓴 작가의 신작이라고 설명하자 이모가 반색을 표한다. 이모는 노안이 오기 전에도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책에 대한 반응이 새삼 놀라웠다. 이모의 반응으로 나는 강한 결속 같은 것을 느꼈다. '가족'이라는 단위가 사람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긴밀한 우애의 감각이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조남주'는 여성과 여성,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와 나 사이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있든지 간에 그의 책을 붙잡는 순간 기어코 '우리'가 된다. 우리로서 다시 쓰는 이야기는 「오로라의 밤」 같다. 비로소 '~의 아내' 혹은 '~의 엄마'라는 수식어를 떼어놓고 개체는 올바르게 정립되며, 함께 존재하되 서로를 옭아매지는 않은 채로 오늘을 위해 그토록 긴 세월을 살아왔구나, 싶은 밤을 선물한다.



이제 알겠다. 금주 언니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45, 「매화나무 아래」)


『우리가 쓴 것』 속 여성들을 통해 나는 나의 것이면서도 또 나의 것이 아닌 시간들을 통과할 수 있었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성별 때문에 일상적으로 듣는 '진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모든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육아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워킹맘이었다가 아이의 육아 공백을 대신 메워주는 중년 여성이었다가 동시에 죽을 날을 향해 걸어가는 여성으로 살았다. 그 시간 위를 걷는 동안 여성들에게 한정된 '진부한' 이야기가 세대마다 거듭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함께 억울했고 서운했고 분노로 들끓었고 절망했다. 하지만 어쩐지 지겹도록 반복되는 시간의 순환에도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우리가 쓴 것』에는 있다. 작가의 사인처럼 지금까지 우리가 이미 쓴 것 위에 새겨질 또 다른 '우리가 쓰지 않은 것들'을 향한 기다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지금 여기의 우리가 눈이 되어 흩날리고 나면 그 위로 새로운 꽃이 피어나고 기다렸던 봄이 올 것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에게는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45쪽)" 다음에 오는 봄이 힘들이지 않고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지금 여기의 나는 오늘도 '업데이트' 중이다. "예쁘지 않아도 돼."라고 중얼거리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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