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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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46쪽)"

'무진'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언제나 있지도 않은 고향의 생각이 자꾸 떠오르곤 하였다. '고향'에 대한 알 수 없는 향수와 동경으로 『무진기행』을 읽게 되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작가 '김승옥'은 도리어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가가 그려낸 '서울'은 삶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파멸과 속임수로의 추락으로 비치기도 한다. 서울이 마냥 삶의 희망으로 여겨지고, 이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열차에 몸을 싣던 때가 있었다. 미국의 그것처럼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울 드림'을 품곤 했던 것이다. 이처럼 희망과 열망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서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씨에는 공간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애매모호한 부사 활용으로 듣는 사람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하고, "차나 한 잔"과 같은 "일종의 추파(189쪽)"가 대화 안에 비일비재하다. 서울로 도달하던 때의 정열적인 초심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붙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여지를 남겨두는 화법과 이루어지지 않을 약속을 주고받는 우리의 문화는 불확실한 서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생존방식이고, 그런 무기력함은 어쩐지 서울에 품고 있던 애초의 욕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친 서울을 향해 손을 뻗으며 구원과 해방을 바랐지만, 정작 거기에 있었던 건 파멸이었고, 갑작스러운 노화였다. 서울의 이면은 「생명연습」에서 '오 선생'이 말한 '윤리의 위기'가 떠오르게 만든다. '오 선생'은 만화를 그리면서 직선을 그리는 경우에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때로 자를 사용하여 그리곤 했다. 그렇게 그려 놓은 직선 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오 선생'은 독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다. "그건 당신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직선이라는 의사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의 선이다. 당신은 우리를 속이려 하는구나라고.(98쪽)" '자'를 발전의 산물로 설정해 놓고 보니 이 문장이 심상찮게 들린다. 우리는 산업과 기술의 발전으로 착실하게 근대성을 쌓아 올려 지금의 서울을 얻었지만, 역시 우리 고유의 서울을 만들어 내는 일에 실패했고, 능률과 효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숱한 사람들이 도태되도록 부추기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 위에 먹칠을 해 버리"는 것이 소위 말하는 "자라난다(120쪽)"의 의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서울이 '직선'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좀 더 효율적이고 편리한 방법을 추구할 때 우리가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겼다면 등을 돌리면 될 일이었다. 우리는 그보다도 '염소'가 죽어서도 힘이 세다는 사실을 차츰 받아들이는 데 그쳤다. 처음엔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것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을지라도, 자본 등의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나면 금세 본래의 자리에 눌러 앉곤 했다. 그러니까 서울에 대해 반대할 명목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무얼로써 이 공간과 시간을 채우겠다는 거냐?(380쪽)" 하는 물음을 그칠 수가 없다.

그것이 서 씨가 간직하고 있는 자기였고 내가 그와 접촉하면 할수록 빨려 들어갈 수 있었던 깊이였던 모양이었다. (144쪽)

서울에 잠식되기 이전의 대안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모색하는 일을 택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은 '생존 본능'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서울은 제 나름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고 소수의 상관이 내린 지시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데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렸다. 이를 벗어나 스스로의 모습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때문에 서울 살이에 피로함을 느끼고, 지금은 서울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 귀농의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인 '무진'과 언젠간 그곳에 갈 것이란 강렬한 희망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실제로 거기에 가게 될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무진'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삶을 살아갈 이유를 얻게 된다. 이에 대해 「무진기행」 속에서 '아내'는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40쪽)"를 언급하고 있다. 거주자가 아닌 여행자로서 거기에 갔기 때문에 자유를 느끼는 것이며, 새로운 여행지에서 느낀 일탈의 기쁨은 세월이 지나면 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잊힐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무진읍'으로 가기 위해 아득바득 이 책을 손에 쥐었지만, 결국엔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41쪽)"는 팻말을 보았을 뿐이다.

'서울'과 '무진'을 오고 가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쩐지 아무도, 어느 곳도 완전히 틀리고 또 옳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것도 자신 있는 생각은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젊은이가 보았다는 두 가지 생활이, 사실 바로 곁에서 함께 있다고 하면 나도 좀 멍청해져 버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느낌뿐이었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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