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유년의 기억,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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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89쪽)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이어지는 두 권의 책에는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시리즈명이 붙어 있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혀두고 있듯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작가가 어릴 적 기억에 의존해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심지어는 소설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작가 개인의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유년의 기억을 옮겨두고 있는데, 이를 읽고 있노라니 애틋함에 자꾸만 울컥하는 마음을 붙잡을 길이 없었다. 그건 세계대전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던 시기를 버텨내야 했던 어린 '완서'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꾸만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싱아'가 어떤 모양으로 생긴지도 모르고, 그 냄새나 맛은 자연히 알지도 못하는데도 '싱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번뜩 흙바닥을 휘젓고 다니던 어린 시절이 연상되고는 했다.

그렇다면 내가 잃어버린 '싱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어린 '완서'가 마음으로부터 연민을 느끼던 서울 토박이로, "너울대는 들판"이나 "풀과 들꽃과 두엄의 냄새"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다. 그 대신에 불량스러운 과자들이나 이제는 단종된 몇몇 기계들이 나와 친구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런 것들만 보면 친구들과 잘도 흥분해서 어릴 적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술술 풀어놓고는 했다. 하지만 '완서'의 '싱아'를 보니 알 수 없이 샘이 났다. 시대가 변하고 나면 언제든 사라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라, 항상 거기에서 나를 기다려줄 것들로 추억을 채워 넣고 싶었다. 어떤 향긋한 냄새나 탁 트인 풍경 앞으로 어린 나를 세워두고 싶었다. 시대가 진보할수록 과거를 또렷하게 기억할 만한 감각들이 사라져 가는 것 같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동청도 겁나지 않았다.(312쪽)

자연의 일부로서 자라날 기회 이외에도 어린 '완서'는 어른들의 깊은 애정과 어머니의 굳은 의지 속에서 자라났다. 특히 '완서'의 어머니는 남녀 차별이 극심하던 때에도 어린 '완서'가 '신여성'으로 자라날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완서'와 그녀의 오빠를 서울에 데려와 신식 공부를 시켰다. 그건 굉장히 탁월한 선택이었는데, '완서'가 세상에 눈을 뜨고 자신의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시대적인 암흑에 어떤 빛이나 용기가 되기에는 역부족(177쪽)"이었던 어머니였지만, '완서'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을 만큼 강인하게 자라나도록 한 데에는 전쟁통에 아이들 둘을 홀로 키운 어머니의 공이 컸다.

'싱아'에 대한 추억과 고된 서울살이 속에서 느꼈던 독서의 즐거움, 가족들과의 정겨운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스무 살의 '완서'가 탄생했다. 6·25 전쟁 동안 가까스로 피난을 가면서 '완서' 본인과 그녀의 가족들은 완벽하게 궁지에 몰렸다. 그녀의 오빠를 기다리는 동안 후퇴가 지체된 바람에 격전지에서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을 버텨낼 각오를 해야만 했다. 이처럼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자 '완서'의 안에서는 도리어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목격하게 될 미지의 사태와 거대한 공허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책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어디에 처박혀 있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완서'를 자극하고, 그녀는 시대적 환경이 준 공포를 초월해 작가로서의 자아를 획득한다. 후대의 우리는 또한 그녀의 글쓰기를 통해 덜 다듬어진 순수한 상태의 우리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현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또 하나의 '찬란한 예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스무 살 '완서'의 번뜩이는 결심이 만들어낸 파도는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일렁이며 다가와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증언하도록 부추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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