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67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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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제 머리 위에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부동점, 판타레이의 신고로부터 유일한 피난처가 자리하고 있는데도, 그건 제 사정이 아니라 진자의 사정이란다. (20쪽)

살면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이름 가운데 '푸코의 진자'가 있었다.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게 무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한 마디도 제대로 뱉을 수 없는 이름들 말이다. 세상에 대해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진 내 앞에 '푸코의 진자'를 바라보고 있는 '카소봉'이 등장한다. 인터넷을 뒤져 가장 알맞은 사진을 골라내고 한참 동안 '카소봉'과 함께 그 진자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거기에 있는 '푸코의 진자'는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부동점, 즉 유일무이한 진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진실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진실의 주변을 맴돌면서 우리는 호시탐탐 '섬광과 같은 영감'을 기다린다.

'푸코의 진자'를 찾아내는 모험에 있어서 <성전 기사단>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하나의 종교이다. <성전 기사단>에 얽히기 전만 해도 '카소봉'은 세상에 무관심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 모든 문장은 그저 '원고 교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카소봉'은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중에 '가라몬드 출판사'의 '벨보'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성전 기사단> 원고를 들고 온 '아르덴티' 대령을 만나게 된다. <성전 기사단> 원고에 '카소봉'이 단박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자신이 이에 대해 연구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르덴티' 대령은 '벨보'와 '카소봉'에게 <성전 기사단>에 얽힌 은밀한 가설들을 들려준다. <성전 기사단>은 여전히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며, 성배를 손에 넣는 순간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아르덴티'의 주장은 흥미롭지만,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터무니없는 주장들에 흔히 그러듯이 '벨보'와 '카소봉'은 난색을 표하고 그에게 다른 출판사로 가볼 것을 권유한다.

'카소봉'과 '벨보', 그리고 '디오탈레비'가 '아르덴티' 대령의 가설을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던 심정은 이해가 간다. 대령은 뚜렷한 기준도 없이 <성전 기사단>의 기록을 해석하기 때문에 사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좋을 것들이었다. 그는 그저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나 독자들에게 미끼를 던지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는 데 불과했다. 무슨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는 데 어느 출판사 관계자가 그를 지원할 수 있었을까? "벨보는 화자를, 경조부박하기 짝이 없는 조물주의, 구제가 불가능한 자식이라고 야유(271쪽)"했지만, 그런 비난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원고를 투고했던 '아르덴티' 대령이 자신이 묵던 호텔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실종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죽음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절대 믿을 수 없다고 여겼던 사건에 커다란 흠집이 나면서 '벨보'와 '카소봉'은 뭔가 대단한 일에 엮였음을 예감한다. 하나의 사소한 유희에 불과했던 <성전 기사단> 원고가 '아르덴티' 대령의 죽음으로 인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보면 <성전 기사단> 그 자체가 하나의 진실인 것처럼 비치지만, 나는 드러난 것들 너머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아르덴티' 대령을 비롯해 '성전 기사단'이나 '장미 십자단'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증명하지 않고 알아야 하는 것을 굳이 증명하려 들기 때문"이다. 증명 또한 '아르덴티' 대령처럼 의혹만을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성전 기사단'이나 '장미 십자단'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사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증명은 미뤄둔 채로 그저 그것들을 알려고 한다. 문학작품에 비유하자면 기꺼이 그 작품의 독자가 되려는 열렬한 의지로 작품은 실체와 상관없이 존속된다.

<성전 기사단>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와 상관없이 그 뒤를 밟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보'는 '카소봉'이 브라질로 넘어가 있던 시기에 <성전 기사단>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맞서기를 포기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생에서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으려고 더 깊숙한 곳으로 자신을 몰아세웠다. <성전 기사단>은 머나먼 곳으로부터 온 설화가 아니라, '벨보'에게만큼은 과거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자신에게 준 단 한 번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벨보'의 다급하고 절박한 목소리는 그에게 어떤 위기가 닥칠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겹겹으로 둘러싸인 껍질들을 벗겨낸다면 그 안에는 어떤 모양의 알맹이가 들어 있을까. 우리는 <성전 기사단>이나 <장미 십자단>이라는 필름을 통해 어떤 세상을 발견해야만 했을까.


이제 '카소봉'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조짐을 보인다. 브라질로 온 목적이었던 여자친구 '암파루'는 사자의 세계와 지금 여기의 세계가 결합되는 체험을 한 이후로 '카소봉'의 곁을 떠났다. 그날의 경험을 부정한다고 해도 육체의 생생한 감각은 '암파루'에게서 지워지지 못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들어맞는 느낌, 그건 '카소봉'으로서도 전혀 알아들 수 없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성전 기사단>이 있기 때문이다.

'알리에'의 말처럼 시간은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건 인간의 편의에 의해 지정된 것뿐이다. 즉, "시간은 B로부터 A로 흐를 수도 있고, 결과가 원인을 야기할 수도 있(374쪽)"다. <선행한다>와 <후행한다>를 어느 쪽에 붙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구부러진 시간 속에서 우리가 밝혀내야만 하는 진정한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독자인 우리는 '카소봉'의 몸체를 통한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제3의 눈'을 얻어내기 위해 이 모험에 동참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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