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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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우리 쌍둥이들한테도 그렇게 알려 줄 수는 있다는 거지? 니모부터 꽃 한 송이까지 자연에도 공생이 넘쳐 난다고. 그게 막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얘기해 주면서 같이 더 많이 찾아봐. 그럼 피부로도 느껴질지 모르잖아."(152쪽)

동생과 엄마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질러 걸으면, 나는 언제나 뒤처져서 그들을 빤히 바라보는 쪽이었다. 그런 나에게서 사람들은 줄곧 '쓸쓸함'이나 '외로움'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도리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편이 나를 훨씬 편하게 만들었다. 예민한 성격으로 인해 상대의 변화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했던 탓이다. 그랬기 때문에 소설의 화자인 '경진'에게 몰입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재미를 찾기보다는 빨리 끝내고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는 일에 급급했고, 상대가 주저할 때는 굳이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없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때도 있고, 괜히 상처를 입게 되는 일도 잦았으므로, 대화를 향한 나의 오래된 적대는 옳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눈다는 것, 특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이 한 사람을, 때로는 나 자신을 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내게 이야기를 할듯 말듯 망설이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툭 터놓고 말하고 나면 편안해질 수 있었을 누군가의 절박함을 망쳐놓지는 않았을까. 또 대화를 통해 사람들 속에 섞여드는 즐거움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후회가 두서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경진'은 간만의 휴가에 질릴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경진'을 향해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한다. 이전의 '경진'은 상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청자'의 입장보다는 '선생님'으로서의 자아가 더 강해 보였다. 상대의 언어는 그녀가 교정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해미' 또한 '경진'에게 가로막혀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지 못한 채로 모습을 감춘다. 사실 '해미'에게 있어서 '경진'은 선생님이나 어른이기 이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그런 사람마저 자신에게 이야기할 틈을 주지 않으니 '해미'로서는 어지간히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경진'에게 내밀한 사정을 털어놓는 기묘한 상황은 때로 '해미'의 복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해미'와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대화가 소설의 끝까지 '경진'을 놓아주지 않는다. '경진'은 '해미'와의 일로 대화에 대한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까 대화의 기회는 영원히 주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며, 평소처럼 흘려보낸 이야기가 누군가와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해미'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두려움은 증폭되고 '경진'의 머릿속에는 이제 두 번 다시 '해미'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진'은 서로 다른 '해미'의 이야기들로 자연스레 빨려 들어간다. 기이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경진'에게 갑작스레 다가와 각각의 은밀한 사정들을 털어놓고 말았던 것은 '해미'와의 일에 대한 후회가 그녀를 대화에 긍정적으로 호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진'이 지금처럼 대화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 데에는 엄마의 질문도 한몫했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77쪽)"라는 엄마의 반복적인 물음은 '경진'을 지치게 했고, '경진'은 자연스레 대화로부터 멀어졌다. 처음에는 '엄마'뿐이었겠지만, 차츰 그 범위가 늘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엄마'와의 대화로 인한 상처는 또 한 번의 대화로 치유된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 엄마의 이야기는 오해를 해소하고, 더 나아가 '경진'이 활발한 대화를 통해 다시 세상으로 녹아들도록 부추긴다. '경진'과 엄마의 이야기는 경청을 기반으로 한 대화가 가진 위안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대화 행위가 주는 숱한 상처들을 뛰어넘을 만큼의 희망참을 작가 '은모든'은 이야기하고 있다.


햇살이 드리운 거리를 느긋하게 걷고

얼굴을 마주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작가의 말')

책을 덮은 지금에도 '해미'의 울먹거리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 단지 몇 마디를 나눠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아이가 드디어 그런 상대를 발견했을 때에 느껴지던 어떤 안도가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경진'과 그녀의 친구 '웅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세우면서 우리는 짧은 시간의 대화가 우리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는 사소한 행복과 위로를 너무 오랫동안 등한시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이 듣고 또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는 다짐은 금세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일처럼 아주 뒤늦게서야 응당했어야만 하는 일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내일 하루 정도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그 사람의 하루가 좀 더 충만해지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배신감에 휩싸여 있을 어떤 이름에게.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사람이 다 다르니까요. 결혼이든 아이든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확고하게 그 반대인 사람도 있는 거라니까요 엄마. 세상에 저나 은주 같은 사람도 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요.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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